<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지난 호에 올해 87세의 권혁진 농학박사가 토종벌 질병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의 토종벌 질병에 관한 연구는 개체수가 감소하고 있는 우리나라 꿀벌의 질병 예방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난 60년간 가축 바이러스 연구 외길을 걸어온 권혁진 박사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두 번째 리포트다.
권혁진 박사가 미국 농무부 농업연구청에 있는 지인에게 올해 2월에 발표한 논문을 보냈다는 것을 쓴 바 있다. 그 사이에 미국 지인으로부터 벌 질병에 관한 전문가에게 논문 내용을 검토해보라고 했다는 답변을 받았다. 권 박사는 미국 농무부 농업연구청으로부터 답변이 왔다는 사실에 무
척 고무돼 있는 것 같았다. 세계적으로 벌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아직 개발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권 박사는 돼지에게서 벌 바이러스를 증식하고 약독화를 통한 질병 예방법과 혈청 치료법 등을 찾아냈다. 이런 사실을 하루빨리 세계 연구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권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나의 연구 내용이 전문가들에게 알려져서 그들이 더 나은 연구를 해내서 조속히 벌 질병이 퇴치될 수 있으면 좋을 뿐입니다. 그들은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국내에선 아직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아 연구자로서 세계 연구계에 알리고자 한 겁니다.”
그의 연구 인생은 1970년대 돼지일본뇌염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1976년에 돼지일본뇌염 백신을 개발해 돼지 질병 예방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 연구 결과와 과정을 정리해 1979년 4월에 일본 도쿄농업대학에서 돼지일본뇌염에 대한 백신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5월 11일과 12일 이틀간 동아일보는 <(돼지)뇌염 예방 「생독 백신」 국내 첫 개발>, <각고의 7년, 인내의 결실– 돼지 생독백신 개발>이란 제목으로 이틀에 걸쳐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안양에 있는 국립가축위생연구소 권혁진 연구팀이 지난 1969년부터 7년간 각고의 연구 끝에 돼지 일본뇌염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2만마리의 돼지에 이 백신을 접종한 결과 93%의 예방 효과를 거두었다고 밝혔다. 지난 1974년에 일본뇌염 유행 후인 9월부터 11월 사이 뇌염감염에 의한 새끼돼지 사산율을 종전의 60%에서 10%이하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냈다고 덧붙였다. 일본뇌염 바이러스는 모기에 의해 사람과 동물에 공통으로 전염될 수 있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권혁진 박사 :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일본뇌염으로 숨지는 어린이가 많았습니다. 가축 동물 중에서 돼지와 말이주로 모기에 물려 일본뇌염이 걸렸습니다. 임신한 돼지가 뇌염모기인 빨간집 모기에 물리면 어미는 항체가 생겨서 괜찮은데, 새끼가 출산할 때 쯤이면 죽어서 나왔습니다. 당시는 돼지를 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도시 변두리에서도 돼지를 부업으로 길러서 팔아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미 돼지의 뱃속에서 100여일 지나 새끼
를 낳는데 죽어서 나오는 겁니다.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어미를 팔아 목돈을 쥘 텐데 죽은 새끼가 나오니 이만저만한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었지요."
"지금은 도시에 모기가 없잖아요, 그래서 일본뇌염이 거의 사라졌지만 사람이 뇌염에 걸리면 죽거나 바보가 됩니다. 옛날에는 뇌염모기가 많아서 뇌염모기에 물리면 1,000명 중 3~4명꼴로 뇌염에 걸렸습니다. 나머지는 항체를 형성해 뇌염을 이겨냈지요. 그러나 지금은 도시에 뇌염모기가 없기 때문에 도시의 젊은 사람들은 뇌염모기 항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도 뇌염에 걸릴 수 있습니다. 시골이나 산에 가서 빨간집 모기에 물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 돼지일본뇌염 연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권혁진 박사 : "돼지일본뇌염은 당시에 워낙 가축농가에 많은 피해를 주는 전염병이서 안양에 있는 국립가축위생연구소에서 계속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호주 퀸즈랜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해가 1970년 12월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멀쩡한 어미 돼지가 죽은 새끼를 낳는 일이 자꾸 벌어져 빨리 백신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연구소장님이 하루는 그동안 연구한 것을 설명해보라고 제 위 상관인 연구관에게 말했습
니다. 당시에는 차트에 써 가지고 다 모여 있는 데서 설명을 했지요. 설명을 듣더니 화를 내며 이 정도밖에 연구 못했느냐고 말하고는 저에게 연구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저는 당시에 연구소에서 중간쯤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때가 겨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농촌에 가서 일본뇌염에 걸린 돼지의 가검물을 채취하고 뇌염 바이러스를 추출해냈습니다. 본격적으로 제가 주무관으로 백신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우리나리에서는 제가 처음으로 돼지일본뇌염 바이러스를 분리해서 증식시키고 병원 바이러스를 약하게 하는 약독화를 실시했습니다. 그 약독화한 바이러스를 돼지에 주사하여 항체를 생기게 하고, 예방 효과를 검증하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백신을 개발했습니다."
"우리 연구팀이 개발한 백신을 주사했더니 90% 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일찍 백신을 만들었습니다만 당시 효과 면에서는 우리 백신이 더 높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백신 개발로 농림수산부 장관이 수여하는 과학상 은상을 수상하고 상금 500만원을 탔었습니다. 그 돈으로 회식을 했는데, 돈이 모자랐습니다(웃음). 저 개인적으로는 근 10년에 걸친 백신 연구 및 시험 자료를 바탕으로 논문을 써 일본 도쿄농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하였습니다. 돼지 일본뇌염 연구가 저의 연구 인생을 일신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 농림수산부 장관이 주는 과학상 은상을 두 번 타셨다면서요?
권혁진 박사 : "소의 바이러스 감염병인 우역 백신을 개발해서 또 은상을 받았습니다. 우역은 남한에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북한에서 많이 발병한 질병이었습니다. 제가 우역 백신을 개발해 북한과의 접경 지역 농가에 백신을 접종시켰습니다. 해마다 휴전선을 따라 쭉 접종해 소 바이러스 전염병의 남하를 예방했습니다."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 백신은 한 번 개발해 놓으면 오랜 기간 쓸 수 있나요?
권혁진 박사 : "그렇지 않습니다. 백신은 살아 있는 것이잖아요, 유효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백신을 개발하는 데 7~8년 정도 걸리죠. 그리고 백신 유효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증식-배양-개발 등의 과정을 통해 일정량을 비축해야 합니다. 바이러스마다 백신을 매년 개발해야 합니다. 또 바이러스는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백신에 저항해 변이를 합니다. 그때마다 가검물을 추출하고 그것의 성질과 원인 규명을 알아내기 위해 꾸준히 실험을 실시해야 합니다. 끈기를 가지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연구입니다."
"한 사람의 연구자가 여러 바이러스를 다 연구하기에 벅찹니다. 우역 백신 논문은 해외에 많이 알려졌습니다. 우역은 남한에서는 거의 발병하지 않았지만 남아프리카와 태국에서는 많이 발병하는 질병입니다. 제가 아는 공무원들이 해외 출장을 가면 현지에서 제 논문을 많이 얘기하더라고 전해주더군요. 그럴 때 정말 보람을 느끼고 더욱 열심히 연구하게 됩니다. 제가 기존에 계란을 이용한 백신 개발 방법에서 탈피해 조직배양세포를 이용한 백신을 개발했습니다. 계란을 이용한 백신제조법은 제조 과정이 복잡하고 대량생산이 어렵고 제조 기간도 오래 걸렸습니다. 계란 혈관에다가 주사를 놓아야 하는데요, 계란은 단백질이 많지 않습니까, 단백질 과민증을 유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걸 조직배양세포를 이용한 백신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제조방법도 간편해 생산기간을 단축시키고 대량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백질 과민증도 감소시켰습니다. 1970년대 말쯤 한때는 엔테로 바이러스가 돼지에 크게 전염 돼 많이 죽어나갔습니다. 엔테로 바이러스는 제 담당이 아니었으나 돼지 농가가 요청하여 죽은 바이러스로 만드는 불활화(不活化) 백신을 짧은 기간에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엔테로 바이러스는 호주 퀸즈랜드 대학에 있을 때 연구한 적도 있습니다. 퀸즈랜드 교수가 엔테로 바이러스가 걸린 돼지 가검물을 갖고 와서 ‘너가 바이러스를 했다고 하니 한 번 분리 해봐라’고 하더군요. 그걸 분리해 보니 정말 엔테로 바이러스가 나오는 겁니다."
"아직 박사학위가 없던 강사가 엔테로 바이러스로 학위를 한다고 해서 같이 연구하게 되었지요. 그는 병리학을 전공해서 바이러스에 대해선 잘 몰랐지요. 그 당시에 돼지 파동이 날 정도로 많은 새끼돼지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연구를 하지 않는 겁니다. 제가 호주에서 연구한 적도 있고 흥미도 있고 해서 연구비를 따내 2년간 연구했습니다. 하루는 전남 순천에서 돼지농장을 하시는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본인이 명색이 축산학교를 나온 사람인데 자신이 기르는 돼지들이 병에 걸려 죽어나가고 있어 창피하다며, 아무래도 엔테로 바이러스에 걸린 것 같다고 배설물 10개를 갖고 왔습니다. 그래서 시험해보니 8개에서 엔테로 바이러스가 나온 겁니다. 긴급히 불활화 백신을 만들어 줬어요. 나중에 잘 듣는다고 고맙다고 저에게 크게 한턱낸 적도 있습니다."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 지난 60년간 연구 생활 동안에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까?
권혁진 박사 : 지금까지 45편정도 썼습니다. 2008년도에 저의 논문 43편을 수록한 개인 논문집을 발간했습니다. 그 이후로 토종벌 논문 등 2편을 더 썼습니다.
권혁진 박사는 국내 최초로 하나의 백신으로 여러 바이러스 질병을 한꺼번에 예방할 수 있는 혼합 백신도 만들어 보급했다. 이로 인해 농가들이 비싼 백신 구입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테면 중앙가축전염병연구소에 재직 시 다섯 가지 개 바이러스 질병을 잡을 수 있는 광견병 혼합백신을 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