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35도를 넘는 폭염마저 즐기는 단체가 있다. 올해로 창설 38년을 맞는 (사)전문예술극단 예인방(이사장 김진호)이다.
지난 5월 이후 공연장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 시리즈로 달군 몸은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퍼블릭 프로그램에서 삼복 무더위에 카운터펀치를 날리고 있다. 특히 반환점을 돈 ‘1기 멘토링 연극학교(이하 멘토링)’는 파이팅이 넘친다.
‘21세기형 인재상 구현’을 위해 나주교육지원청(교육장 서춘기)과의 업무협약을 통해 전국에서 처음 실시되고 있는 ‘멘토링’은 연극 꿈나무를 양성한다는 으뜸 취지 외에도 각 분야 전문가와의 만남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무한한 꿈과 희망을 안겨준다는 비전을 실천하는 마당이라는 점에서 출발부터 예술계의 관심을 모았다.
‘멘토링’의 연극교육은 예인방 소속 10명의 전문 강사들이 11명의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연극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에서부터 연출, 연기, 분장, 조명, 무대미술, 의상 등 커리큘럼을 강의하는 멘토-멘티 방식을 취하고 있다.
교육생들은 나주지역 초등학교 5학년생들로, 이른바 연극 꿈나무다. 이들은 지난 4월 7일부터 여름방학도 잊은 채 오는 10월 30일까지 매주 1회 2시간씩 52회의 마라톤 수업을 받게 된다.
의사, 기자들이 진로탐험을 위한 멘토로
올해 설정한 커리큘럼도 독특하다. 커리큘럼 제목은 뜬금없는 ‘이성계 역사재판’이다. ‘멘토링’에서 이성계는 졸지에 피고석에 앉아 재판을 받는 처지로 몰락하고 있다. ‘요동땅을 정벌하라는 고려왕실의 명을 받고서도 위화도 회군을 감행, 충신 최영과 우왕을 죽였다’는 것이 죄목이다.
‘4대 불가론’이 나오고 ‘철령위’ 등 역사책 속의 전문용어와 ‘하여가’ ‘단심가’ 도 등장한다.
연극교육 외에 의사, 교수, 배우, 기자 등 각계 전문가들이 강사로 나서 어린 멘티들과 미래를 탐험하는 시간도 ‘멘토링’만이 갖는 장르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쓰느냐, 배우가 되려면 무엇을 채워야, 의사는 돈 많이 버나 등에 이르기까지 눈높이를 맞춘 대화가 이어지면 2시간 수업은 3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멘토링’ 1기는 오는 10월 말 수료식을 갖고, 같은 제목의 공연무대를 마련하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2기는 내년 봄에 다시 출발한다.
지역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에 나선 ‘울랄라’
‘멘토링’과 동시에 출발한 ‘울랄라 연극교실(이하 울랄라)’도 지역연극계의 화두다. ‘삼성꿈장학재단과 함께하는 2018년 배움터 교육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역시 나주교육지원청의 도움을 받고 있다. 지난 4월7일 출범해 오는 10월30일 종료된다. 매주 1회 3시간씩 52회가 예정돼 있다.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 50명이 참여하고 있는 ‘울랄라’는 ‘멘토링’에 비해 연극적 성격이 강하다. 1기 ‘울랄라’의 커리큘럼은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한 가치 배우기’다.
‘울랄라’는 나주 영산강에 수장된 ‘앙암바위’에 얽힌 설화를 끌어올린다. 교육생들은 ‘아랑사와 아비사 이야기’를 주제로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탐구한다. 제창마을 아랑사와 진부촌 아비사의 슬프디 슬픈 사랑, 질투에 눈이 멀어 이들을 죽인 인근마을 총각들에 대한 저주, 정성껏 제사를 올려 죽은 원혼들을 위무하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린이들의 연극으로 만들어지고 관심을 끈다. 특히 모든 대사에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 어린이들에게 고향의 맛깔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홍매와’ 광주 교류공연으로 워밍업
올해 예인방의 워밍업은 지난 5월2일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이하 홍매와)’로 출발했다. ‘홍매와’는 지난해 처음 나주무대에 올려져 호평을 받았던 작품으로, 거친 아버지의 속울음을 살피며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을 메운 540여명의 관객들을 잔뜩 흐느끼게 했다.
‘홍매와’는 지난해에 이어 다시 찾은 나주문화예술회관 앵콜무대로 어버이날을 축제로 만들어낸다. 홍매의 긴 그림자가 아름다운 시골집은 여전히 정겹다. 함석지붕이나 손때가 묻은 부엌, 담벼락에 기울 듯 서있는 가로등이 또 그렇게 동행했다.
이제 제 집처럼 포근해진 시골집에서 중견 연기자들의 연기도 탄력이 붙었다.
아버지 김호영의 목청은 봄 햇살 만큼이나 부드러워졌고, 이웃집 장씨 홍순창의 넉살 역시 깊어지고 있다. 어머니 임은희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더 쾡하게 만든다. 이 극을 끌고 가는 둘째아들 동하 이현기나, 푼수 며느리 박선영도 굳었던 어깨에서 힘이 사라졌다. 5월 8~9일 두 번의 공연에서 객석점유율은 100%를 넘어서 ‘홍매와’는 예인방의 롱런 레퍼토리로 터매김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서울지역 향우와 일반관객을 울린 ‘홍매와’
‘홍매와’가 대박을 터뜨린 것은 서울공연에서다. 5월에만 세 번째 무대인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의 퍼포먼스는, 어찌보면 예인방의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상업연극이 판치는 서울에서 정극(正劇) ‘홍매와’의 도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杞)나라의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틀 동안 500석의 대극장은 출향 향우와 일반관객들로 빈틈없이 들어차 기우(杞憂)였음을 증명해줬다.
예인방의 5월은 ‘홍매와’로 시작해서 ‘홍매와’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산어촌 문화향유를 위한 찾아가는 문화공연’으로 펼쳐진 30일 영광문화예술의 전당 무대는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579명의 관객이 입장해 연기자들을 흥분케 했다.
하반기에는 창작연극과 뮤지컬로 승부
기상역사상 기록적인 폭염의 조짐을 보이던 6월21일 예인방은 ‘홍매와’와 잠시 결별한다. 문화재관리청 협력요청으로 서울 경복궁 수정전에서 ‘역사를 지키는 자, 그 향기 천년을 가리라’ 공연을 갖는다.
임진왜란을 맞아 소실 위험에 처한 전주 사고(史庫)를 이안(移安)하기 위한 조상들의 헌신과 희생을 서사적 연극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당시 사고는 전주를 비롯해 성주, 서울, 충주 등 4곳에 위치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서고(書庫)였다.
불타 없어진 3곳을 제외한 전주 역시 풍전등화였으나, 전북 정읍의 이름 없는 유생 안의와 손흥록의 활약에 힘입어 전주 사고는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겨졌고 오늘에 이르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명맥을 잇게 됐다. 64개의 궤짝, 생생한 그날을 재현한 28명의 연기자들의 분투는 3천700여명(추정)의 관람객들에게 숭고한 민족정신을 일깨워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손흥록 역할을 맡은 탤런트 기정수씨는 “세계 최고의 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던 이야기를 다뤄 너무 감격스러웠다”면서 “역사에 자부심이 없는 민족에게 영광 또한 결코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여름을 넘어 하반기에도 예인방의 맹렬한 기세는 이어진다.
창작뮤지컬 ‘드림 드림 드림 하이’ 5탄을 10월께 나주문화예술회관에 올릴 계획이다. 또 올 연말 공연물로 예정된 창작연극 ‘못생긴 당신’(가제)도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에 있다. 이밖에 창작연극과 관련, 낭송공연도 준비하고 ‘멘토링’과 ‘울랄라’의 매조지 작업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예인방의 자취 가운데 눈에 띄는 작업은 다른 분야와의 협업을 꼽을 수 있다. 공연 때마다 한국화가 김진희 교수가 극장로비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고아트 뮤지션스가 로비음악회를 추진해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곤 했다. 특히 이 입체적인 이벤트는 사전고지를 통해 잠재적인 고객들을 극장으로 적극 유도하는 효과를 가져와 올 가을에도 공연물에 삽상한 색을 더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진호 이사장은 “올해 처음 실시한 ‘멘토링’과 ‘울랄라’ 연극학교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게 큰 과제”라며 “전반기의 성과에 머물지 않고 토속적인 정서와 문화를 다룬 콘텐츠 개발과 연기 재충전 등을 통해 예인방이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한해로 장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TV 드라마 ‘주몽’ ‘구암허준’ ‘옥중화’ ‘도둑놈 도둑님’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한 바 있는 연기자이기도 한 김진호 이사장은 현재 케이블 채널인 드라맥스 ‘마성의 기쁨’에서 병원장 여재만 역을 맡아 열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