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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캄보디아 현지인들에게 사랑전도사 역할 자처

the 나눔 플러스 임정희 단장

〔김미진 기자〕오지(奧地)만 찾아다니며 나눔을 실천하는 나눔 전도사 ‘the 나눔 플러스’ 임정희 단장. 캄보디아 현지에 ‘the 나눔 플러스’라는 현판을 부착하고 그들과 소통해오고 있는 임 단장은 나눔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했다. 냉혹한 현지의 환경 속에서 그들에게 질서의식을 전하고 교육에 대한 집념으로 봉사를 해오고 있는 임정희 단장을 만나 아름다운 나눔 인생에 대해 들었다.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25분~30분 거리에 있는 조용한 마을보건소에는 ‘the 나눔 플러스’이라는 작은 현판이 눈이 띈다. 인구가 대략 2천700여명 정도 되는 이 작은 곳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한국인. 처음에는 봉사활동을 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현판을 다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아 힘들었다는 임 단장은, 그들의 행정서비스에서부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눔을 실천하는 것보다 어려웠었다고 털어 놓았다. ‘the 나눔플러스’라는 이름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는 “원래는 ‘봉사봉생’이었는데 단란주점 같다고 해서 코원(co1)으로 바꿨었다. 그랬더니 코원에너지라는 곳에서 전화를 걸어와서는 그 이름을 쓰지 말아달라고해서 할 수 없이 더 나눔으로 바꾸게 된 것”이라며 웃었다. 주변 지인들이 웨딩드레스를 무료로 기부해 줘서 무료 결혼식을 올려주고 책을 기부해줘서 움직이는 도서관을 만들 수 있었다는 임 단장과의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Q. the 나눔 플러스는 어떤 단체인가요?
A. 의료봉사, 웨딩봉사, 그리고 움직이는 도서관 등의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단체입니다. 의료봉사는 강남차병원과 함께 펼쳐오고 있으며 한방처방에는 아이누리한의원 황만기 박사가 함께 해주고 있습니다. 정기적인 회원은 40명인데 큰 행사를 할때는 120여 명이 함께 합니다. 저희 회원들을 잠깐 소개한다면 가족구성입니다. 사회에서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자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면서 힘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지난해 4월에는 진도 7.8규모의 강진에 이어 지난 12일 진도 7.3의 지진이 발생해 대규모 인명·재산 피해를 입은 네팔의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구호품도 보냈습니다. 40톤 분량인데요. 여기에는 의류업체를 비롯해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었습니다.


Q. 여러 나라들을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해오고 계시는데 특별히 애착을 가진 나라가 있나요?

A. 저희 봉사단체가 가장 많이 찾는 나라가 캄보디아입니다. ‘한국전쟁 때 캄보디아에서 쌀을 한국한테 줘서 그걸로 연명을 했다’는 말을 아버님을 통해서 들었어요. 그래서 가장 관심이 많이 가고 마음도 많이 갑니다. 캄보디아는 우리가 수교가 안 돼 있다보니까 어떤 일을 하려고 했을 때 절차가 참 힘듭니다. 오늘은 된다고 했다가도 내일이 되면 ‘언제 봤냐’는 식이다 보니 늘 마음을 졸여야 해요. 저희 봉사단체가 캄보디아 한 마을의 보건소에 현판을 달았는데 처음에는 정말로 힘들었어요. 지역 경찰서장한테서 승낙을 받은 서류가 있는데도 막무가내로 안 된다고 우기는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4년 전현판을 붙였죠.


한 번은 봉사활동을 갔더니 캄보디아보건복지부에서 허가를 못 해주겠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니까 ‘당신 뉴스도 안 봤냐’는 겁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더니 한국 남자가 캄보디아 신부를 고의적인 교통사고를 내서 죽이고 보험금을 타먹은 사건이 있었더라고요. 그 사건이 나니까 ‘당신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하지 않냐’면서 ‘당신도 돈이 많아서 우리나라에 놀러 온 게 아니냐’고 하는데 정말로 울고 싶더라고요. 보건복지부 담당자하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 보니까 지역주민들이 들고 일어났어요. “우리는 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신들이 뭔데 그러냐”고 난리를 친 겁니다. 그 사이 경찰서장한테까지 알려져서 이 사람들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중재 때문에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어쩌면 봉사활동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이런 부분인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지역의 학교장님과 마을이장님께서 이런 저희 마음을 잘 받아줘요. 지난해에는 저희봉사단이 도착하니까 이장님께서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알고 글로 써서 프린트한 다음에 마을사람들에게 돌리고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울컥했어요. ‘더 많은 약속을 하기보다는 지금까지 했던 약속을 지켜서 신뢰를 지키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Q. 현지 환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와서 치료해준다면서요?

A. 중증환자들은 현지에서 치료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그 환자들을 한국에 데려와서 치료해서 돌려보냅니다. 처음에는유방암 말기 환자를 한국에 데려왔는데 힘들더라고요. 수술을 하고 자기들 나라로 보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잖아요. 그래서 요즘엔 어린아이들을 데려옵니다. 거기서는 희귀성이라서 못 고치는 병도 우리나라에선 한 달이면 완치가 가능합니다. 아이들을 데려올 때면 항공비라든가 병원비에 대해서는 보건복지부에서 지불하지만 먹는 비용이라든가 이런 건 저희 봉사단이 각자 사비를 각출하여 씁니다. 캄보디아에서 오신 분들은 우리나라가 굉장히 춥다고 해요. 그래서 의복비도 지출해야 해요.


아이들을 데려오면 맛있는 음식도 먹이고 치료도 해주면서 롯데월드 같은 곳에 데려가서 놀이기구도 태워줍니다. 처음에는 애들이 눈이 동그래져서 놀라죠. 그 아이들이 그래요. 자기네 나라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해서 다시 한국에 올 거라고. 캄보디아를 발전시켜서 한국을 이길 거라는 거죠. 한 아이는 한국에 와서 하얀 쌀밥을 보더니 놀라더라고요. 자기네 나라에서는 소금하고 젓갈밖에 못 먹는데 한국에 오니까 먹을 게 많으니까 얼마나 먹었던지 배탈이 났어요. 아픈 아이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치료를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갈 때면 너무 감사해요.



Q. 우물관리가 안 돼서 물을 먹을 수 없다고 하던데...?
A. 보통 한국의 NGO단체들은 현지인들에게 우물을 파주는 일을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우물 파는 것을 막았으면 좋겠어요. 우물을 파게 되면 관리를 해줘야 하는데 그게 안 이뤄지다보니까 물을 먹을 수가 없다고 해요. 그래서 저희봉사단체에서는 200~350만 원 정도를 들여서 우물에 있는 물을 빼내는 필터를 달아주는 작업을 해오고 있어요. 한 우물을 관리하는데 한 달에 5~6불이 들어간다고 해요. 그들이 좋은 물을 마셔야 질병에도 안 걸리고 피부질환도 안 생기는데 물이 안 좋다보니까늘 질병에 시달려요.


환자들과 예길하다 보면 ‘뒷목이 뻐근하다’ ‘앞이 안 보인다’ ‘속이 메스껍다’ 이런 증상들이 아주 많아요. 물론 백내장에 걸린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습니다. 특히 ‘회충’이 아주 심해요. 그래서 ‘종합비타민’이 가장 필요하죠. 현지인들에게 종합비타민을 주면 그 다음날 ‘잠을 아주 잘 잤다’고 말해요. 캄보디아는 사탕수수가 많은데도 그걸 갖다 팔아야 하니까 먹질 못하잖아요. 대신 사카린(시나당)을 섭취하다보니까 식도나 위 등 소화기관이 많이 손상되는 거죠. 세계적으로 당뇨수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캄보디아인데 우리는 당수치가 150만 넘어도 큰일 나는줄 알지만 그들은 보통 200~230이에요. 저희도 처음에는 항생제 같은 약만 처방해줬는데 오랫동안다니다 보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지금은 가벼운 것부터 처방해주죠. 현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약이 과립형 복용약인데 한국 명약이라고 해요. 우리가 먹어서는 잘 안 듣는 약도 그들은 먹으면 바로 효과가 나타나요. 약을 먹어본 적이없으니까요. 피부질환이 많아서 연고처방도 많이해주는데 우리나라 연고보다는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연고를 처방해주죠. 아주 간단한 치료인데도 그렇게 치료를 받고 나면 현지인들의 얼굴색이 달라져요. 그들의 얼굴이 환해지면 저절로 기분도 좋아지고요.


Q. 국내에서도 봉사활동을 합니까?
A. 처음 봉사활동을 시작했던 경기도 광주에 있는 은혜동산하고 용인에 있는 무법정사를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무법정사는 스님께서 운영하시는 청소년(부모님이 없거나, 장애인, 부모님이 있는데 파산돼서 맡긴 아이들)을 돌보는 곳인데 가보니까 너무 협소한 곳이었어요. 이 두 곳을 다니면서 사용하고 남은 약품은 캄보디아에 보냈죠. 그때만 해도 각자 만나서 봉사활동을 해왔는데 지난해 캄보디아에서 너무 많은 양의 약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와서 아예 사단법인(the 나눔)을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Q. 어려운 분들께 무료결혼식도 올려준다고 들었습니다.


A. 제가 ‘로맨스파파’라고 하는 단체를 하나 만들었어요. 결혼한 지 40년이 넘은 분들을 추천받아서 결혼식을 해드리는 건데 지난 11월에는 SH공사에서 하는 합동결혼식에 돈을 받고 참여했습니다. 아마 처음으로 비용을 받고 결혼식을 올려준 것 같아요(웃음). 물론 비용이라 해봐야 조금 받은 건데 그 돈으로 네팔에다 약을 더 지원해주려고 해요. 올해 네팔에 지진이 났잖아요.


그때 약품을 좀 지원을 해줄 수 있겠냐고 요청이 왔었는데 그걸 다 해주지 못했거든요. 지난 번 지진 났을 때 제가 네팔에 가 있었어요. 거기서 선교 활동하는 분들을 만났는데 한국에 오니까 전화가 왔더라고요. 현지에서 필요한 게 있다는 거죠. 얼마 전에는 한 번도 얼굴을 뵙지 못한 분인데 몽골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는 분이 전화가 왔어요. 그곳에도 굶는 아이들이 너무 많으니 도와달라는 겁니다. 어떤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추방을 당한 건데 고아아이들을 데리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네가 그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아이들이 다 죽을 거 같아서 숨어 있다면서 너무나 간절하게 도와달라는 겁니다. 언젠가 몽골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갔더니 우리 한국 사람들이 입었던 헌옷들이 참 가치가 있어 보이더라고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새 옷을 보낼 테니 그 옷을 팔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상인이 하는 말이 그 헌옷을 팔아서 1년 넘게 먹고 산다는 겁니다. 거긴 저체온으로 죽어가는 애들이 많아요. 저보고 그걸 도와달라는 겁니다. 그때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걱정이 돼서 다음날 퇴원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텐트며 겨울옷이며 이불, 신발 등을 다 모았어요. 한 트럭이 되더라고요. 그걸 인도 캘거타 쪽으로 보내고 저도 바로 들어갔죠. 현지에 가서 보니까 여진이 계속 되고 있더라고요. 거기서 한국 의료계에서 오신 분들을 만났어요. 정년퇴직하고 봉사활동 하신 분들도 만났는데 퇴직하시고 나서 퇴직금을 모두 가지고 들어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오게 됐냐니까 네팔이 좋아서 왔대요. 10명, 20명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정말로 보이지 않는 나눔을 실천하는 좋은 분들이 많았어요.


Q. 웨딩드레스를 무료로 지원해준 분이 따로 계신다고요?

A. 제가 멋진 웨딩드레스를 많이 갖고 있는데 그걸 지원해준 분이 이명순 디자이너입니다. 제가 봉사를 한다니까 좋은 데 쓰라며 주셨어요. 보통 무료결혼식이나 장애인결혼식에 가보면 너무 오래된 웨딩드레스를 입히잖아요. 저는 무료결혼식을 해줄 때도 되도록 헤어나 메이크업 분야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분들께 부탁을 해서 도움을 받아요. 지난번 SH공사에서 한 합동결혼식에도 몇 분이 흔쾌히 승낙해 주셨어요. 제가 장애인이나 어려운 분들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주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어요. 제 딸 둘이 결혼을 했는데 결혼날짜를 잡아 놓고 어느 분의 초대를 받은 적이 있어요.


장애인들을 합동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자리였는데 웨딩드레스를 보니까 눈물이 확 쏟아지더라고요. 그걸 보고 너무 화가 나서 그분한테 ‘댁 따님이라면 저 드레스 입혀서 결혼시킬 수 있겠냐?’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너무 화를 내는 겁니다. 옆에 기자가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냐면서. 노란 배지를 단 지역일꾼이 자기 이미지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걸 보면서 정말로 화가 났어요. 그길로 이명순 디자이너를 찾아갔습니다. 제 딸이 결혼 할 때 드레스를 선물해줬었는데 그때가 떠오른 겁니다. 그랬더니 현재 투어를 돌리는 제품 빼고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모두 폐기하고 있는데 그걸 기꺼이 주겠다는 겁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의 작품을 장애인이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입힐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했어요. 멋진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린 분들이 아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Q. 봉사를 해오면서 힘든 점도 많을 텐데요?
A. 다른 건 괜찮은데 같이 봉사하는 분들과 마찰이 생기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 같아요. 물론 사람이 많아지고 단체가 커지다보면 잡음이 생기는 건 당연한데도 속상할 때가 있죠. 그럴 때면 초심을 생각해요.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 잡죠. 항상 욕심도 버리려고 노력하고요. 양심을 버린 사람들로 인해서 속상할 때도 있어요.


한 번은 서울의 한 지역에 있는 실버타운에서 어르신들을 위해 건강검진도 하고 두피 마사지도 해드리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지역 국회의원이라는 분들이 와서는 자기들 관할이니까 어르신들께 인사를 하겠다는 겁니다. 지금은 봉사활동을 하는 시간이라 안된다고 했더니 아주 위압적인 자세로 고함을 치는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죄송하지만 여기는 봉사하는 자리이니 인사를 하실 거면 다음에 하십시오. 그랬더니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당신이 뭔데 그러냐’고 고함을 치더라고요. 제가 세금 내는 시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르신들께 인사드리고 싶거든 조금이라도 기부를 하시라고 했더니 선거법에 걸린대요. 그럼 조끼입고 음식이라도 나르라고 했더니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너무 화가 나서 그럼 그냥 가시라고 했더니 저를 사기죄로 집어 넣어서 매장시킨대요. 나중에 그 의원이 창피했던가 봐요. 미안하다고 하시기에 제가 그랬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드리고 가시라고. 한국 정치인들 모습인 것 같아서 씁쓸했죠.


Q. 원래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의료기기 무역업을 했어요. 당시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 그걸 하긴 했는데 참 힘들더라고요. 그러다 어떻게 해서 돈도 많이 벌었죠. 그때 지인 한 분이 하시는 말씀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으면 접는 것도 용기다 그러더라고요.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 모든 걸 잃을 수 있으니 이쯤에서 접으라는 충고였죠. 제가 은퇴한 지가 벌써 11년째인데 너무 일찍 은퇴를 하다 보니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나 자신을 계발해보자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이 봉사죠. 봉사에 대한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1년 반 돌아다니다 우연히 경기도 광주에 있는 은혜동산과 용인에 있는 무법정사에서 봉사할 기회가 생긴 거죠. 쉴 틈 없이 봉사를 하러 다니다보니까 우울증도 자동으로 치료가 됐더라고요. 제 딸들이 우리 엄마 놀이터는 봉사하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봉사에 대한 가슴은 친정어머님께 물려받은 것 같아요. 봉사를 직접 하면서 어머니의 마음도 이해하게 됐고 제 삶이 얼마나 감사한지도 알게 됐죠.(웃음)


Q. 앞으로 어떻게 봉사활동을 해나갈 건지도 말씀해주시죠.
A. 머리로 사랑을 나누는 거보다 가슴과 가슴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가능하다면 그 징검다리 역할을 제가 하고 싶어요. 현장에서 팀원들과 함께 봉사하는 그런 봉사자가 되고 싶어요. 제가 딸이 셋인데 두 딸은 결혼을 하고 하나만 미혼입니다. 제가 봉사하는 걸 보면서 딸들도 모두 봉사하는 걸 보람으로 여기며 삽니다. 너무 행복하잖아요.


바람이 있다면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웨딩드레스가 지하 2층 창고에 쌓여있습니다. 누군가 조건 없이 1층 점포를 하나 내줬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영국 옥스팜을 갔는데 거기에 웨딩 숍이 있더라고요. 웨딩드레스를 직접 팔기도 하고 빌려주기도 했는데 빌려주는 가격이 아주 저렴했어요. 왜 저렇게 저렴하냐고 물어봤더니 매장 직원이 여기는 최고의 디자이너들의 옷만 취급하는데 일반인들이 빌려 입는 비용은 모두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한다는 겁니다. 최고의 디자이너 작품을 빌려주고 번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한다는 게 너무 아름답잖아요. 결혼식을 하고 싶은데도 환경이 어려워서 엄두를 못 내는 분들께는 무료로 결혼식을 올려줄 수 있어서 좋고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옥스팜 제도를 도입해 볼 생각입니다. 제 작은 노력이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멈출 수 없잖아요.(웃음)


MeCONOMY Magazine January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