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윤 기자] 지난해 10월 백화점 점원과 손님사이에 ‘갑질’논란이 불거진 영상 하나가 인터넷에 확산됐다. 의자에 앉아있는 고객 맞은편에 점원으로 보이는 두 명의 여성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이 영상은 지나가던 다른 고객이 촬영해 올린 것으로 알려졌고, 영상이 공개된 후 손님으로 보이는 여성을 비난하는 글이 쏟아져 나왔다. 매년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지만 감정노동의 예방과 치유, 기업차원에서의 선도적인 지원, 정부나 자치단체의 제도적인 보호 등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15년 11월 서울노동권익센터는 백화점·면세점·대형마트 등 유통산업 분야에 있어 감정노동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는 유통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1천24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와 면담조사를 바탕으로 감정노동과 산업안전, 노동환경 등의 실태를 분석했다. 한국형 감정노동 평가도구를 활용해 감정노동에 대한 위험범위를 측정한 결과, ‘고객응대의 과부하 및 갈등’ ‘감정부조화 및 손상’ ‘조직의 감시 및 모니터링’ ‘조직의 지지 및 보호체계’ 등 각 영역에서 위험수준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객응대의 과부하 및 갈등’ 영역에서는 계산원과 안내데스크 노동자의 50%가 위험군에 있었으며, ‘감정부조화 및 손상’ 영역에서는 여성노동자의 62%가 위험군에 속해 있었다. 또 ‘조직의 감시 및 모니터링’과 관련한 항목에서는 대형마트의 64.7%, 면세점의 60.2%, SSM의 55.3%, 백화점의 48.8% 여성노동자가 위험군으로 측정됐다. ‘조직의 지지 및 보호체계’ 평가항목을 측정한 결과, 대형마트(71.3%), 면세점62.4%), SSM(53.8%), 백화점(40.1%)의 순으로 위험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지만 감정노동의 예방과 치유, 기업차원에서의 선도적인 지원, 정부나 자치단체의 제도적인 보호 등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매년 수차례씩 문제가 되고, 각종 언론에서도 끊이질 않고 등장한다. 전문가들은 공론화 과정은 충분해서 조례제정 및 입법화에 필요한 사회적 합의과정도 활발히 전개됐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법제화나 정부의 정책적 대응은 아직은 미흡한 실정이다.
감정노동 강도 가장 센 직업, 1위는 텔레마케터
국내 주요 직업들 가운데 감정노동의 강도가 가장 센 직업은 텔레마케터(전화통신판매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10월14일 한국고용정보원(원장 유길상)이 우리나라 주요 직업 730개 직업 종사자 2만5천550명을 대상으로 감정노동 강도를 분석·비교했다. 고용정보원은 직업별 감정노동 강도를 알아보기 위해, 직업 종사자들이 일을 할 때 ▲전화, 대면, 전자메일 등 대인 접촉 빈도 ▲외부 고객 또는 민원인 대응 중요도 ▲불쾌하거나 화난 사람을 대하는 빈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감정노동이 많은 직업은 고객 또는 민원인과 직접 접촉을 통해 직무수행이 이루어지는 의료·항공·경찰·영업·판매 등 서비스 직업군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한국고용정보원 박상현 연구위원은 “최근 서비스 관련 직업군의 비율이 빠르게 늘고 있는 추세에서 ‘고객만족’이라는 소비문화가 만들어 낸 그늘이 감정노동”이라며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웃는 낯으로 고객을 대해야만 하는 감정노동 직업인을 위한 관심과 배려, 정책적 지원이나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텔레마케터·호텔관리자·네일아티스트·중독치료사 등이 감정노동을 많이 하는 직업 순위 윗자리를 차지했다. 주유원·항공권발권사무원·취업알선원 등도 감정노동 강도가 센 직업으로 꼽혔으며, 상점판매원·고객상담원·해양경찰관도 감정노동이 많은 직업 상위 2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감정노동이 많은 직업 상위 20개
감정노동을 구성하는 하위 항목별로 순위가 높은 직업들도 발표했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많은 직업은 주유원·중독치료사·치과위생사 등의 순으로 나타났고, 외부 고객 또는 민원인을 대하는 일이 많은 직업으로는 중독치료사·자연환경안내원·보험대리인 및 중개인 등이 상위에 올랐다. 또한 일을 하면서 불쾌하거나 화난 고객 또는 무례한 사람을 대하는 빈도가 높아 정신적 스트레스가 높은 직업에는 텔레마케터·경찰관, 보건위생 및 환경검사원·항공기객실승무원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정부, 감정노동에 의한 우울병 산재 인정
서울시의회, 관련 조례 발의
우리 사회가 ‘감정노동’에 대한 관심은 적은 편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종 학술논문들은 말할 것도 없고, 2014년 국가인권위에서는 120 서울다산콜센터에 상담사 인권개선을 위한 정책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후 일부 서비스업종 기업에서는 감정노동수당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정부(중앙정부 입법, 지방정부 조례)에서도 감정노동 관련 제도화 움직임이 있고, 노사 당사자(단체협약)는 물론 시민사회단체에서도 다양한 활동(캠페인)들이 확산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2015년 11월2일, 시간제 근로자·특수형태근로종사자·감정노동자에 대한 산재보험 보호를 확대하는 등의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시행규칙’ 및 ‘고용보험 및 산업재해보상보험의 보험료징수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개정안은 감정노동에 의한 정신질병 산재 인정기준을 개선했다. 산재보험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에 ‘적응장애’와 ‘우울병’이 추가됐다. 그동안 고객응대 업무를 맡고 있는 근로자의 정신질병 피해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나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에 ‘외상 후 스
트레스장애’만 규정돼 있어 산재 인정이 어려웠다.
고용노동부는 관계자는 “이번 개정을 통해 텔레마케터, 판매원, 승무원 등 감정노동자가 고객으로부터 장시간 폭언을 듣고,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는 등 고객응대 후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아 우울병이 발생하게 되었다면 산재로 인정받는다”고 밝혔다. 또 우울병은 우리나라 정신질병 중 발병 비중이 가장 높은 질병으로서 적응장애와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까지 포함하면 업무상 인과관계가 있는 대부분의 정신질병이 산재보험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
한편 서울특별시의회 권미경 의원(새정치민주연합비례대표)은 2015년 11월23일 서울시 및 산하기관에 근무하는 감정노동종사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서울특별시 감정노동종사자의 권리보호에 등에 관한 조례’를 제264회 정례회 때 발의한다고 밝혔다.
권 의원은 “전국최초로 서울시청 34개 조직, 사업소 및 직속기관 19개 조직, 산하기관 13개 조직 1천200여 명을 대상으로 서울시 공공부문 감정노동실태 및 현황 설문조사와 일반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서울시 공공부분 감정노동 관련 인식파악 및 정책수립에 대한 온라인여론조사를 토대로 서울연구원(원장 : 김수현)과 공동으로 지난 6월20일부터 10차례의 연구진 회의를 열고 1번의 일반인 공청회와 전문가 공청회를 통해 서울시 공공부분 감정노동실태와 문제점을 검토해 이 조례안을 발의하게 됐다”고 밝혔다.
연구는 크게 ▲감정노동 관련 국내외 선행 연구 검토 ▲서울시 공공부문 감정노동 실태와 문제점 ▲서울시 감정노동의 노동과정 분석 ▲서울시 공공부분 감정노동 건강권 분석 ▲서울시 공공부문 감정노동 정책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며, 「서울특별시 감정노동종사자의 권리보호에 등에 관한 조례」는 총4개장 24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 의원은 “이번 조례안은 광역지자체 최초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조례안을 제정하기 위해 전문 연구위원들이 수개월간 연구해 나온 결과라는 데 의의가 있다”면서 “서울시 감정노동자 보호 조례 제정으로 서울시가 노동존중특별시로 거듭나도록 이끌어 갈 것이며, 서울시가 전국의 60만 감정노동종사자의 보호에 선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 조례안은 서울시의회 제264회 정례회에서 기획경제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본회의에서 통과되면 공포한 날로부터 즉시 시행된다.
누구와 어떠한 말도 나누고 싶지 않다
“말이 없어지고 혼자 있고 싶어진다. 친구는 물론 가족과도 어떠한 말도 나누고 싶지 않고, 아주 사소한 일들로 폭발하곤 한다. 감정에 대한 표출을 억압받다보니 나와 같은 일을 하면서 열심히 하지않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퇴근 후 건강한 저녁시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TV만 틀어놓고 새벽 3시까지 멍하게 있다가 그제야 가까스로 움직일 힘이 생기곤 했다. 삶의 의욕이 없어져 일상이 불균형해지고 끼니와 잠이 불균형해지자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2014년 10월 국회에서 열린 증언대회에서 26세 여성이 콜센터, 백화점 점포, 사무직 보조 등의 일을 하면서의 경험을 증언했다. ‘일상적·반복적 감정노동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거 같느냐’는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이화의료원 직업환경의학과 김현주 과장은 올해 11월 ‘감정노동과 노동사회’ 심포지엄에 참석해 “과도한 감정노동은 스트레스와 관련된 다양한 질환을 유발할 수 있으며 실증적 연구에서 우울증, 근골격계증상, 월경곤란증과의 연관성이 보고되고 있다”면서 “감정노동자의 건강문제는 감정노동 및 폭력 뿐 아니라 감정노동자들이 처한 작업환경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할 수 있으며, 다른 스트레스 요인에 복합적으로 노출될 경우 우울증 발생위험이 더욱 더 증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한의원을 찾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방창호 기맥한의원 원장은 “최근에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화병’을 얻어 한의원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면서 “한의학에서는 마음을 뜻대로 펴지 못하거나 고뇌와 분노로 기운이 원활하지 못하면, 간울증(肝鬱證)이 발생한다고 밝히고 있다”고 전했다.
방원장은 “간울(肝鬱)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인후부에 이물질이 막혀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거나 부녀에게는 유방창통, 월경부조 등을 일으키며, 항상 비위에 영향을 미쳐 간비부조(肝脾不調)의 병증이 나타나게 한다”며 “이런 스트레스성 환자의 경우 병을 진찰하는 게 아니라, 환자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고려해 치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흔히 ‘아프다’고 하는 통증과 감정을 컨트롤 하는 것 모두 우리 뇌에서 관장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은 통증에도 예민한 편”이라며 “실제 임상에서 만성통증으로 한의원을 찾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화병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예의와 친절은 함께 베풀고 지키는 것
“○○○ 있어?” “네? 없는데요” “뭐야, 편의점에 없으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저희 편의점에는 없어요” “참나 짜증나네” 취재원이 한 편의점에서 목격한 광경이다. 처음 보는 어린 편의점 알바생에게 들어오자마자 첫마디부터 반말이다. 편의점 알바생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송하다며 계속 존댓말로 응대한다. ‘손님은 왕이다’가 변질된 모습이다.
기업들도 감정노동에 대한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대고객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에게 힐링캠프, 명상, 예술치료 등을 도입하는 곳이 늘고 있다. 감정노동수당을 따로 책정해 지급하고 있는 곳도 생겼다. 하지만 대기업처럼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중소기업들은 이마저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제도적인 개선은 당연하지만, 우리 모두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와 의식이 개선돼야 하지 않을까. 예의와 친절을 함께 베푸는 사회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회라는 점을 잊지 말자.
MeCONOMY Magazine January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