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조 기증사진전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시대의 아픈 흔적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이번 사진전에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가질 정도로 상당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전민조 사진가는 이번 전시회의 발간사를 통해 ‘나는 왜 사진을 찍게 되었나?’라는 짤막한 질문과 함께 자신의 삶 속에 녹아든 사진이 단순한 의미를 지나서 역사적 기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찮다고 생각해 스쳐버렸음직한 다양한 모습들을 놓치지 않고 프레임에 담아 미래의 가치를 부여한 그 시절 사진 속으로 들어가 봤다.
카메라가 그림과 글보다 사진으로 역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했다는 전민조 사진가. 그가 사진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미술대학 진학에 실패한 후 베트남 파병에 지원했다가 총알이 튀는 전투현장에서 총 대신 카메라를 매고 용감하게 사진을 찍는 외국 전쟁사진가들을 목격한 이후라고 했다.
“서라벌예술대학에 사진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지원했을 때 면접 보는 교수님이 그런 얘길 합디다. 왜 사진을 하려고 하느냐고. 제가 그랬습니다. 지금까지는 글로 세상을 이야기하던 문학시대였지만, 앞으로는 사회전반에 이미지의 비중이 크게 확대되어 세계적으로 영상시대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후 사진에 목숨을 건 그의 인생이 시작됐다. 그의 모든 삶은 카메라와 함께, 세상과 호흡하는 시간으로 변했다. 내가 바라보는 대상은 모두 내 것이라는 마음으로 기록하자는 정신으로 미치광이처럼 사진을 찍었다는 전민조 사진가는 “어떤 것을 찍어도 역사를 말해주는 그런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급격히 변모하는 시기라 사라지는 것들 모두가 사진거리였습니다.” 전민조 사진가는 당시 기자로서 정보에 의해서 찍는 사진보다 영상시대에 사진이 특종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 결과 한국일보 기자시절 특종을 터트리며 신문사회면을 톱으로 장식하기도 했다고 한다.
“통근열차 안에서 소매치기가 들끓는 것을 보고 범죄를 사진으로 찍어서 소탕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매치기 일당을 한 달 동안은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현장을 결국 찍었죠. 증거로 강력반 경찰들에게 넘겨서 소매치기 일당을 체포할 수 있었으니까요.(웃음)”
‘사진 한 장을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 따라 간다’는생각으로 요트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취재와 고대산악부와 동행한 알래스카 머킨리봉 원정취재, 그리고 설악산 산양을 찍기 위해 두 달간 산속을 헤매는 경험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집요함은 사진으로 남아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역사 속에서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 대한 소감을 묻자 “책으로 읽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을 알게 해준 언론사 생활과 다양한 직업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시간들이 큰 경험이 되었다”며 “기자는 때로 모험과 도박을 해야 한다. 모험심이 없거나 위험을 피하려고 하면 기자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생명력 없는 정보를 전달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취재원의 가슴에 묘한 울림을 전했다. 현재 전민조 사진가는 그동안 카메라에 담아 왔던 사진 속 인물들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취재원은 전민조 사진가에게 전시된 사진들을 찍기까지 당시 취재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을 부탁했다.
“이 사진은 1978년(4월20일)에 찍은 사진인데 제목이 압구정동입니다. 지금의 갤러리아 백화점 부근을 버스 타고 지나가다가 아파트를 배경으로 소를 끌고 밭갈이 하는 농부를 목격하고 버스에서 내려서 찍은 겁니다. 제가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압구정동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는 순간 이게 또 변하겠구나! 이곳이 서울의 중심부가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압구정동이 개발을 시작하면서 이 사진을 찾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아파트 건축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책을 만드는데 꼭 필요하니까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지난해에는 이 사진 때문에 ‘2014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에 다녀왔습니다. 건축 관련자가 그러는데 이제는 건축도 사진 없이 모형만 갖고 말하면 사람들이 안 온대요. 이 사진을 크게 붙일 테니까 사진을 몇 장 더 줄 수 있겠냐고 그러기에 촬영자가 별지도 보내주고 사진을 쓰게끔 해주겠다고 했더니 초대한 겁니다. 여기가 과수원이었는데 마지막 농사였다고 해요.”
“1978년(7월3일)에 있었던 북한군 ‘알몸 귀향’사건입니다. 북한 어부들인데 당시 우리 해군함정이 5명인가를 구조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목욕도 시키고 시계며 신사복이며 다 사서 입혀서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마중 나온 사람이 어부들한테 귓속말로 ‘옷 벗고 행패 부려라’ 그러니까 어부들이 옷을 모두 벗어던진 겁니다. 시계도, 구두도 모두 벗어 던지고 속옷만 입은 겁니다. 옷이 날아가고 구두가 날아가고 난리가 났는데 그 틈을 타서 제가 속으로 들어가서 취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사진이 현재 판문점 2층에 마련된 VIP실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근무하는 공무원이 한 번은 찾아와서 이 사진을 달라는 겁니다. 뭐 할 거냐니까 전시실에 전시를 한다고 해서 줬어요. 지금도 거기에 가면 이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1972년(11월2일)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찍은 사진인데 버스 차장이 손잡이를 잡고 금방 버스에 오른 승객을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입니다. 언젠가는 버스차장도 없어지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버스를 쫓아가면서 찍었습니다.
이 고단한 직업이 초가집하고 똑같아 보였어요. 초가집도 항상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안 찍는 기자들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 없어져 버렸잖아요. 버스 차장의 애처로운 표정을 보면서 시대상을 본 겁니다. ”
“1972년(10월9일) 전남 진도군 조도면 대마도에서 찍은 ‘섬마을 어린이’입니다. 사실 이 소년을 만나는 게 제 꿈입니다. 지난 10월에 이 사진이 매일경제에 나갔는데 그때 날 찾아와서 너무 반가웠어요. 이 소년과 함께 오겠거니 했는데 ...
(섬마을 어린이는 취재원의 고향 초등학교 동창이다. 신문에 나온 이 사진을 보고 전민조 사진가와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든 이 소년을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이 소년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원초적 행복에 가득 찬 웃음이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진을 찍을 때 이 소년이 깔깔 거리고 웃으면서 ‘아저씨, 영화촬영 하는 거예요?’ 그렇게 물었거든요.
당시 저는 한국일보에서 카메라 기자로 있을 때인데 저희 신문사가 해군본부하고 낙도 어린이들에게 치료와 위문을 하기 위한 행사를 진행했어요. 육지하고 낙도가 너무 격차가 심하니까 그런 행사를 한 거죠. 원래는 선배들이 가야 하는데 한 번 가면 19박20일 정도 낙도를 돌아다녀야 하니까 선배들이 배멀미를 해서 사진을 못 찍는 겁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 해서 멀미 안하는 사람 손 들어 그러기에 제가 들었죠. 제가 원래 멀미를 안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건데 한 번 가서 사진을 많이 찍어오니까 그 다음해에도 또 가라고 해서 두 번을 갔습니다. 이 사진은 수많은 사진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사진인데 때 묻지 않은 섬 아이의 환한 미소가 강하게 남아서 내 삶이 힘들 때면 언제나 사진을 꺼내보는 버릇까지 생겼습니다.(웃음)”
“1982년(7월14일) 전라북도 남원에서 찍은 ‘농부’사진입니다. 저는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늘 생각했던 게 농사를 오래 지은 사람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가뭄 때도 찍고, 비올 때도 찍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농부들의 사진을 참 많이 찍었습니다. 그러데 제가 생각하는 농부의 얼굴이 아닌 겁니다. 농부라면 자연과 어울리는 그런 얼굴이어야 하는데 그런 얼굴이 안 보이더라고요.
어느 날 비가 많이 왔는데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복장이 참 희한한 노인을 봤습니다. 쟁기를 들고 가는데 소 등에는 비료 포대를 찢어서 소가 감기에 안 걸리게 덮어씌우고 자신도 비닐로 비를 안 맞게 싸고 가는 겁니다. 하도 복장이 희한해서 눈에 금방 띄었죠. 버스기사 아저씨한테 내려달라고 해서 그 노인이 일하는 밭으로 막 뛰어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비가 오니까 품속에 카메라를 담았다가 꺼내서 서서도 찍고 앉아서도 찍고 밭에 엎드려서도 찍고요. 그랬더니 노인네가 쟁기질을 하다가 전라도 말로 “뭘 그렇게 많이 찍어 쌌소?” 그러는 겁니다. 성자 같은 모습이라 참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후 지난 2007년(12월8일) 25년 만에 이 노인을 만나고 싶어서 사진 3장을 뽑아서 찾아갔습니다. 저는 사진을 찍고 나면 항상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데 펼쳐 보니까 남원시 대산면 풍촌리라는 곳이더라고요. 대산면사무소를 찾아가서 면장한테 이 사진을 보여주니까 벌떡 일어나더니 “어떻게 찍었냐”는 겁니다. 자기가 그 노인네 큰 아들하고 친구라고 하면서 노인네 둘째 아들은 강남경찰서 강력계 형사반장이고, 셋째 아들은 마을이장이라는 겁니다. 셋째 아들이 와서 사진을 보더니 빨리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해서 갔더니 노인께서는 3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해서 산소에 가서 큰 절 올리고 왔습니다. 살아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참 아쉬웠습니다.”
“1982년(1월22일)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서 찍은 ‘성철스님’입니다. 성철스님은 조계종 본부에 올라오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인사로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갔더니 스님들이 하는 말이 ‘성철스님은 사진 찍는 걸 싫어하니까 이틀 밤은 자야 된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백련암에서 이틀 밤을 잤는데, 성철스님은 인터뷰를 안 하니까 산책하러 나오면 사진을 찍으라는 겁니다.
아침 6시에 산책한다고 해서 지키고 있다가 성철스님이 나오는 걸 보고 찍었습니다. 이 사진 찍고 성철스님한테 욕 많이 먹었죠.(웃음) 물자를 아껴야 하는데 필름을 마구 쓴다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치시더라고요. 상좌스님이 좋은 사진을 많이 찍어야 한 장 고를 수 있다고 하니까 “그래도 그렇지” 그러시는데 목소리가 굉장히 크더라고요. 정말 누더기 옷을 입고 계셨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합니다.”
“1986년(2월10일) 서울 종로에서 찍은 ‘김동진 작곡가’입니다. 이분은 6.25 때 평양에서 남한으로 내려오다가 38선에서 북한 정보장교에게 체포되었다고 해요. 북으로 끌려갈 마지막 단계인데 북한 장교가 “뭐 하는 사람이오” 물으니까 음악가라고 했더니 “당신이 작곡한 게 뭐 있소” 그러더래요.
그래서 “가고파 김동진”이라고 했더니 “그러면 가고파를 한 번 불러보시오” 그러더랍니다. 만약에 노래를 안 부르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목청을 가다듬고 ‘가고파’를 부르니까 눈을 감고 듣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 정말 잘 들었소. 내려가서 좋은 노래 많이 만드시오” 그러면서 남들 모르게 뒷문으로 풀어주더랍니다. 이날 사진을 찍을 때도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바이올린을 꺼내 와서 즉석에서 ‘가고파’를 연주해주고 나서는 예술은 이데올로기나 그런 것들을 모두 다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예술의 힘이 그런 데 있구나 싶어서 더욱 예술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
많은 기록들....그 속에 담겨진 사연도 각각
이 외에도 이날 전시회에는 불안한 소년(경남 의령1982년 6월 14일), 탐험가 노영문 이재용(미국LA 1980년 8월 6일), 마지막 건배 (서울 1972년 2월 1일), 마지막 재산(서울 중량교 부근 1972년 8월 19일), 울고 있는 농부(서울 여의도 1988년 7월 18일), 카메라가 잡은 소매치기 사진(동인천역 1972년 7월) 등 많은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사진 속에 담겨진 다양한 모습들은 그 시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생활상은 어땠는지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김왕식 역사박물관장은 “역사는 수많은 기록을 통해서 기술되고 새롭게 해석 된다”며 “수많은 기록 중에도 ‘사진’이 가지는 ‘기록의 가치’는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때로는 결정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역사 속의 한 장면으로 기록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현대사의 격랑 속에 변모해가는 한국 사회를 가장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사진’에 주목해 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다큐멘터리 사진가 7인의 작품 466점을 수집하여 대표 사진을 선정해 전시하여 오고 있다. 그 첫 번째 전시는 소장사진전 ‘시선·기록·역사 Views, Records, History’(2014.11.17.~2015.03.29)이며, 두 번째 소장사진전은 ‘민주화의 길’이라는 부제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큰 분수령이 되었던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과 관련된 사진(2015.04.13.~10.18)이다. 이번 전민조 기증사진전(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는 2015.10.26.~내년(기간 미정)까지 전시예정에 있다. 취재원은 김왕식 역사박물관장과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Q.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2013년부터 연속하여 ‘소장사진전’을 전시해 오고 있는데요. 이번 전민조 사진가 기증사진전이 열리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A. 역사박물관에서는 우리 현대사를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2014년부터 소장사진전을 연속으로 기획하였고 세 번째 사진전으로 ‘전민조 기증사진전(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을 구성하였습니다. 2013년부터 사진가 전민조로부터 몇 차례 사진을 수집하였고 이를 인연으로 2014년에는 3만여 컷의 방대한 인화사진과 원본필름을 비롯하여, 카메라 등을 기증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감사와 그 자료들을 조금이나마 소개하고자 이번 사진전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사진전과 사진집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첫 번째 ‘사진기자 전민조’에서는 사진기자로 30여 년간 활동하며 찍은 기자들의 일상과 신문사 편집국의 풍경, 보도사진들을 담았습니다.
두 번째 ‘그가 담은 세상’에서는 다큐사진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담아낸 각기 다른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만난 사람들’은 정치인, 경제인, 예술가, 종교인 등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과 더불어 농부, 해녀, 노동자처럼 필부들의 모습도 담아냈습니다. 인간이 사회의 근간이면서 역사를 움직이는 원형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사진 철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Q. ‘전시와 사진집으로 소개되지 않은 많은 자료들은 단계적으로 디지털 변환과 체계적인 정리를 통해
공개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히셨는데 몇 점의 사진을 기증받으신 건가요?
A. 전민조 사진가는 그의 사진이 우리 현대사를 비춰주는 사료와 기록물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자신이 촬영한 인화사진과 필름, 사용하던 카메라 등 총 8,358점을 박물관에 기증하였습니다. 필름은 총 6,511점으로 35mm필름(칼라·흑백·슬라이드)과 120mm필름 등입니다. 이를 컷 수로 계산하면 약 29,000여 컷에 이릅니다. 인화되지 않은 여분의 사진 컷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고, 원본 필름이기에 아주 중요한 자료로 여겨집니다.
인화사진은 총 1,829점으로 다양한 장르를 담고 있는데 서울, 한국인의 초상, 애연(愛煙), 손, 부부, 농부, 섬 등 다양한 주제로 묶여 그의 시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주로 인물에 몰두했는데 정치인과 연예인 등 특정인은 물론 농부, 상인 등 일반인까지 각 풍경과 함께 그 속에 녹아있는 인물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스크랩북은 총 11권으로 한국·동아일보 사진기자 시절 본인이 촬영한 사진과 신문기사를 같이 정리해놓은 자료 모음집(1973~1981)입니다. 사진을 제출하였으나 편집되고 기사만 나간 사례들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 게재된 기사의 정황 파악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 그는 본인이 사용하던 카메라 7점도 기증해주었습니다.(Nikon F2, Rolleicord, Technika, Nikonos IV-A, Nikon F-301, Nikon FM2, Canon G12)
Q. 이번 기증전은 기증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고 사진가 전민조의 사진세계를 소개하고자 마련되었
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기증받게 된 것인지요?
A.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박물관에서는 2013년부터 한국 사회를 가장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사진’에 주목하여 기록사진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사진가 전민조의 사진집과 블로그를 통해 그의 기록사진들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였고, 그의 사진이 우리 박물관에서 꼭 수집되어야 할 현대사 자료로 판단되어 일부 선별하여 수집하였습니다(211점). 당시에는 박물관에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이용권과 함께 인화된 사진을 작품 에디션으로 수집 했습니다. 이를 인연으로 사진가께서 2014년에 본인이 평생 촬영한 원본 필름과 그에 따른 저작권 전부를 국가기관에서 잘 보존하고 활용되기를 바란다면서 박물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Q. 관장님께서 바라보시는 전민조 사진가는 어떤 사람인가요?
A. 전민조 사진가는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아우르는 열정적인 사진 소통가입니다. 평소 ‘사진은 곧 역사이며 모든 예술은 사진을 이용하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하여 왔는데 그만큼 사진에 대한 열정이 대단합니다. 기자시절에는 촬영이 어려운 상황도 마다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사진 찍지 말라는 선배들의 야단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셔터를 누른 열정적인 보도 사진가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또한 그는 사진 촬영과 강의 활동, 다수의 사진전과 출판을 통해 사진으로 소통하려는 노력을 펼쳐왔습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아우르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현대인의 삶을 향해 있고 그는 지금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 중입니다. 기자의 예리한 시선, 사진가의 열정과 풍자가 담긴 그의 사진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소중히 보관·정리되어 전시 및 현대사 연구에 요긴히 활용될 예정입니다.
Q. 전시회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열리며, 연말에 가까워서 전시하게 된 이유가 있는지요?
A. 전시는 10월 26일(화)부터 일반에게 공개하였습니다. 보통 2~3개월을 계획하는데 내년 초 특별한 공간 계획이 있기 전까지는 유지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연말을 목표로 이번 사진전을 계획한 것은 아니고 이전 사진전(민주화의 길)이 끝나고 이어서 기획된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전민조 선생님의 기증의 큰 뜻을 기리고 그의 사진을 국민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세 번째 사진전의 주제로 삼은 것입니다.
Q. 관람객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A. 10월 26일부터 11월 1일까지 프리뷰 기간 동안만 약 2,000여명의 국민들이 오가며 관람하였습니다. 평일에는 200~300여명, 주말에는 400~500여명의 관람객들이 사진전 공간에 오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그냥 스쳐 관람하지 않고 사진과 함께 배치된 설명글을 꼼꼼히 읽으며 한 점 한 점 보시는 분들이 많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주제의 사진자료를 적극 발굴·수집하고, 전시와 다양한 콘텐츠 개발 등을 통해 국민들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eCONOMY Magazine December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