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라 장 한국플라멩코협회장이 11월5일 스페인 최고 권위의 ‘국왕 훈장’을 받았다. 한국에서 ‘플라멩코’로 스페인 국왕 훈장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페인 국왕 훈장은 스페인의 국익을 위해 헌신한 자국 공무원, 경제협력 증진에 기여한 외국인에게 수여되는 것으로, 그간 故김영삼·노무현 전 대통령,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안상수 전 창원시장 등이 상을 수상한 바 있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 내에서 활동하며 스페인 국왕 훈장을 받은 오늘까지 롤라 장이 써내려간 한국의 ‘플라멩코’ 이야기를 들어보자.
빠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리듬 속에서 현란한 기교를 선보이는 기타연주, 원색의 화려한 주름치마를 입고 격렬한 발놀림과 몸짓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무용수의 춤, 그리고 거칠고 깊은 목소리로 영혼을 뒤흔드는 노래. 스페인 남 부의 따가운 햇살 아래 마지막 발길을 내디뎠던 집시들의 피끓는 한이 담긴 ‘플라멩코(flamenco)’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 렬한 개성을 지닌 전통 예술이다.
플라멩코가 국내로 들어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전 년이다. 국내 최초 드라마 플라멩코 공연작품인 ‘플라멩코 카르멘’을 선보이고 국악과 플라멩코 콜라보 공연을 소개하는 등 국내에 플라멩코 인지도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해 온 사람은 다름아닌 롤라 장 한국플라멩코협회장(이하 롤라 장). 롤라 장은 사단법인 한 국플라멩코협회를 설립해 플라멩코 공연은 물론, 스페인 페 스티벌, 플라멩코 콩쿨, 시각장애인 플라멩코 무용단 창단, 청소년 스페인 문화체험 등 다양한 활동으로 한국 플라멩코 의 역사적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롤라 장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교육활동을 통해 프로페셔널 강사들을 배 출하며 한국과 스페인 문화교류에 활발한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국내에서 펼쳐지는 스페인 전통 춤과 노래, ‘플라멩코 카르멘’
국내에서 펼쳐지는 스페인 전통 춤과 노래 ‘플라멩코 카르멘’, 먼저 등장한 남자무용수가 마치 투우사가 ‘카포테’를 흔들며 황소를 모는 듯한 모습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뒤따라 등장한 빨간 드레스의 여성 무용수들은 한손에는 치맛자락을, 나머지 한손에는 부채를 흔들며 무대를 어느새 붉게 물들인다. 스페인, 그것도 플라멩코의 고향인 ‘세비야’에서나 펼쳐질 것 같은 이 화려한 무대가 한국에서도 10년 넘게 펼쳐지고 있다.
롤라 장이 지난 2007년 선보인 뮤지컬 ‘플라멩코 카르멘’이다. ‘플라멩코 카르멘’ 공연에서는 총 20가지가 넘는 스페인 전통 플라멩코 음악과 춤을 만나게 된다. 롤라 장은 “극본 각색부터 안무는 물론 연기동선, 의상 등까지 모두 직접지도하 며 만들어 자식과 같은 작품”이라면서 “플라멩코 춤을 주요 테마로, 뮤지컬 요소를 가미해 스페인 정통 플라멩코의 진수와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롤라 장은 “한 국에 플라멩코가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중성도 의식 하지 않을 수 없었고, 플라멩코의 주요 장르를 총망라해 후 학들에게도 남겨질 교육적인 모델도 제시해야 했다”면서 “그 러면서도 정통성을 살려 한국에 올바른 플라멩코를 소개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늙은 영혼’ 플라멩코,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여행객들이 스페인 여행을 갈 경우 가봐야 할 곳 1순위가 세 비야에서 보는 플라멩코 공연이다. 하지만 플라멩코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실제 롤라 장이 플라멩코의 감수성에 사로 잡혀 2002년 스페인 세비야로 날아가 한국인 최초로 플라멩코 전공과정을 이수하고 돌아왔지만, 국내에서는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롤라 장은 “공연을 할 때면 매번 플라멩코 아티스트가 부족해 발을 동동 구르며 살아왔다”면서 “게다가 한국의 공연기 획사나 관객들은 기술과는 상관없이 외국인 얼굴을 필요로 해서 전통 플라멩코 무용수도 아닌 러시아 무용수들이 하늘까지 킥을 차며 공연을 하는 것을 보며 속상할 때도 많았다” 고 토로했다.
저변 확대에 골몰하고 있을 때 스포츠, 춤 등을 통한 다이어트 열풍이 불며, 플라멩코도 그런 쪽으로 홍보해보자는 유혹이 들어오기도 했다고. 주위에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해라’ 하고 유혹받기도 하고 초반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플라멩코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는 롤라 장은 “플라멩코를 알고 계신 분들도 그냥 빨간 드레스에 흥겹고, 섹시하고 관능적인 춤으로만 알고 계신분이 많았다. 하지만 플라멩코는 인간내면의 희로애락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춤이다. 스페인에서 ‘늙은 영혼’이라고 부를 정도로 깊은 내면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 춤이라는 점 을 먼저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 거주하는 스페인 남성들 무대 세워
롤라 장은 워낙 부족한 국내저변과 자금부족으로 직접 한국에 있는 스페인 남성들을 가르쳐 무대에 세운 적도 있었다 고 말했다. “큰 마음을 먹고 주한 스페인 대사님께 스페인을 더욱 잘 알리기 위함이니, 외교관 가운데 젊고 괜찮은 남자들을 골라 추천해 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당시 대사님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셨죠. 그들을 가르쳐 ‘플라멩코 카르멘’ 중에 젊은 군인, 마을 군중으로 세울 수 있었어요. 쉽지 않았죠. 아무리 대사의 지시라도 본인들의 의지가 없다면 배울 수 없는 게 춤이잖아요. 자국에서도 배우지 않았던 플라멩코를 한국에서 야단 맞아가며 배운다는 것이 정말 아이러니 했을 거에요.”
사회 신참으로 조직 내 각종 시험에 플라멩코 대규모 공연을 앞두고 이들이 징징대며 각종 핑계를 대기 시작했을 때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 롤라 장은 그럴 때마다 “한국 사람인 내가 이렇게 열심히 스페인 문화를 알리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핑계대지 말아라, 공연이 코앞인데 이제 와서 절대로 힘들다 는 말은 하지 말자”고 다그치며 노력한 결과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롤라 장은 “이렇게 이뤄낸 ‘플라멩코 카르멘’ 공연은 지금 도 잊을 수 없고 그에 따른 성취감도 굉장히 컸다”면서 “국 내에서 10년 넘게 공연을 하고 있는 원동력”이라고 자부심을 내비췄다. 당시 공연을 함께한 그들과 당시를 회상하며 “Gracias”를 주고받는다는 롤라 장은 앞으로도 그들과 각별 한 인연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스페인 무용수들과 세계투어 해보고 싶어
각종 어려움 속에서도 ‘플라멩코 카르멘’이라는 작품으로 한국에 플라멩코를 알려온 롤라 장. 그러나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고 있다. 떠도는 집시의 ‘영혼’이 깃든 플라멩코와 우리의 ‘한’(恨)이 교차점이 있었던 걸까. 롤라 장은 국악과의 접목도 시도해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가야금 명인 故백인영, 국악 피아니스트 임동창 씨의 국악에 맞춰 정통 플라멩코와의 콜라보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각종 공연에 후학 양성을 위한 교육활동까지 쉴 틈이 없어 보이는 그는 여전히 더 큰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
“저의 문하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 어 디서든 플라멩코를 배울 수 있죠. 누구나 행복하게 춤을 배 우고 출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만든 작품으로 스페인 젊은 무용수들과 성공적인 세계투어를 해보고 싶어요.” 롤라 장은 언젠가 그런 기회를 찾게 되길 기대하면서 계속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