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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김기신 전 인천광역시의회 의장

"이 사회는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살아온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새벽 우유배달원부터 시작해 거대프랜차이즈 사장, 그리고 시의회 의장까지. 김기신 인천광역시의회 전 의장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력의 주인공이다. 그를 만나 진솔한 삶의 철학을 들었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기신 전 인천광역시의회 의장은 1982년 26살 되던 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역에 내려 무조건 전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인천 주안역이었다. 그렇게 그는 아무 연고도 없는 인천에서 도시의 삶을 시작했다.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우유배달이었다. 자신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것 밖에 내세울 게 없었다고 힘주어 말한 그는, 일자리를 잡으러 새벽부터 돌아다니다 우유배달원과 인사를 나누게 됐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큰 교훈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는 부지런함과 바른 인사성으로 배달원들과 안면을 튼 그는 무작정 우유대리점 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대리점에서 주안에 있는 공단들에 우유를 집어넣겠다는 매출계획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그는 200ml 우유 200개 판매를 허락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우유배달은 지역의 공장에서부터 제과점과 다방, 그리고 당구장에다 요쿠르트까지 배달하며 단숨에 5천개를 넘어섰다. 사람까지 고용해 일을 하면서도 그의 부지런함은 지칠 줄 몰랐다.


김 전 의장은 "밤새 우유배달을 마치고 나면 양계장에서 계란 100판을 사서 인근 다방과 제과점에 팔았고 낮에는 공업사를 돌며 말그대로 24시간을 정신없이 일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에게 인생의 기회가 찾아온 포장마차를 차리게 된다. 그리고 포장마차를 하며 한국 롯데기공을 방문하던 일본인 바이어에게서 전해들은 일본 야끼도리에서 영감을 얻어 닭꼬치를 우리나라 처음으로 개발했다.  김 전 의장은 "처음으로 닭꼬치를 개발해 서울 남대문 등 서울 경기지역에 납품을 하면서 공장을 세우고 포장마차를 정리했다"면서 "그렇게 시작된 닭하고의 인연이 멕시칸 치킨 프랜차이즈부터 시작해 지금의 불로만(주)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아픈 과거와 실패가 성공으로 이끌어


김 전 의장의 사업가적 기질은 IMF가 터지기 직전 1997년에 다시 한 번 더 빛을 발한다. 튀김이 건강에 안 좋다는 의식이 자리잡아가는 시절 과감히 멕시칸치킨 프랜차이즈를 정리하고 바비큐라는 새로운 종목으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그의 세상 흐름을 읽는 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현재 불로만(주)은 400개가 넘는 전국 체인으로 일궜다. 특이한 점은 통상적으로 기업은 자사의 아이템에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김 전 의장은 아이템을 공개했다는 점이다. 김 전 의장은 "이 사업을 시작할 때 바비큐 아이템을 경쟁자들에게 공개했다"면서 "혼자만 새로운 아이템을 시작하면 전국에 활성화 될 수 없지만 여럿이 한 번에 분위기를 올리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김 전 의장이 연고도 없는 인천에 홀로 올라와 살아온 데는 남모르는 아픔과 슬픔이 있다. 충남 홍성의 유지셨던 할아버지와 씨름 선수였던 아버지밑에서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면도 사업에 뛰어 들어 집안의 모든 재산이 사라졌다. 빚 때문에 그의 아버지, 어머니, 누나 이렇게 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18살부터 서울 남대문에 올라와 장사를 시작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빚쟁이에 쫓기던 아버지를 뵈러 가끔 내려갔었는데 그마저도 간경화에 걸리신 아버지가 저에게 짐이 될까 유서를 남기시고 58세 나이에 세상을 버리신 겁니다." 이후 그는 많은 방황을 하다가 탄광에 들어가 몇 년간 광부로도 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목장을 차렸지만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소설에나 나오는 인생 역경이었다. 김 전의장은 "아픈 과거와 성공, 그리고 실패의 연속이 지금의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현재 경영에서 물러난 상태이다.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성공한 사업가로서 창업하고자 하는 후배 자영자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청했다. 이에 대해 김 전 의장은 "실패하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
니다. 업종을 선택하고 사업에 들어갈 때는 외부에서 차입을 해서라도 업종의 최고 중심상권으로 들어가야 해요. 차입금은 벌어서 갚으면 그 가게는 본인 것이 됩니다. 또 사업하는 사람은 손님을 왕이 아니라 신으로 모셔야 합니다. 손님이 내 가족을 먹여살려주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마음을 다해서 손님을 대하면 결국 그 손님이 내 사업을 성공하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라고 조언했다.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싶어


현재 김 전 의장은 정치가로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원래 정치 쪽에는 관심도 없었다는 그는 포장마차 장사를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5.18 광주사태 비디오를 보고 민주당에 입당해 후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이후 2010년 6.2 지방선거 당시 민주당에 사람이 없어 출마를 하고 지방선거에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바로 시의장을 역임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뭐였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신문고"였다고 말했다.


시청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꽹가리를 치며 소리치며 우는 것이 보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김 전 의장은 "이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법규에 의해 처리해 줄 수 있는데도 공무원들이 안일하게 대충해서 잘못 처리된 경우도 있었다"며 "실제 관련 법규에 어긋나 해줄 수 없는 것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준 것만으로도 분하고 억울한 게 풀리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뿌듯했다"고 말했다. 물론 신문고가 분하고 억울한 것을 들어달라는 것이 우선적 목적이지만 지역민들과 마음을 터놓고 나서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를 가짐으로서 그들의 마음 속에 응어리진 것이 조금은 수그러드는 것을 보면서 더욱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늘 청원경찰로 막혀있던 인천시 의장실은 김 전 의장의 임기동안은 완전히 개방됐다. 이후 그는 문제해결을 위해 현장탐방을 최우선으로, 인천의 모든 군 지역의원과 시청의 관련 책임자, 시의회의 공무원들을 귀찮을 정도로 데리고 다니며 현장에서 듣고 현장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러다 보니 현장에서 의회의 상임위가 열리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말 그대로 현장에서 답을 찾은 것이다. 김 전 의장은 그렇게 현장탐방을 다닌 이유에 대해 "그러라고 인천시민들이 세금을 내고 막강한 권한을 나한테 위임해준 것"인데 이를 소홀히 할 수 있냐며 오히려 반문했다. 예산편성심사권, 의결권, 감사권까지 모든 것을 시민을 위해 사용한 만큼 지역의 일꾼으로 열심히 일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는 얘기다.


공천권, 지역 주민에게 반납해야


김 전 의장은 지난해 5월28일 새누리당에 입당하고 유정복 후보(현 인천시장) 지지를 선언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그는 "인천이 새롭게 변하지 않으면 희망을 찾지 못할 것"이라며 "유정복 후보의 경인전철 지하화 공약에 공감해 새누리당에 입당하게 됐다"고 밝힌 바있다.


김 전 의장은 당시 당적을 변경한 이유를 "처음 우리 지역에 민주당으로 출마를 한 이유는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당대표의 대표수락 연설 때문이었는데 공천권을 중앙에서 갖는 것과 지역 유권자들이 갖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면서 “공천권을 지역주민에게 반납하니 ‘이제 바로 서는 구나’ 생각해 출마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경인전철 지하화는 김 전 의장이 새누리당에 들어가며 유정복 현 인천시장 지지선언하게 된 계기가 됐다. 경인전철지하화 개발이 아닌 복원를 끊임없이 주장해온 경인전철 지하화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경인전철 지하화는 주안역에서 포장마차를 하면서부터 늘 꿈꿔오던 것입니다. 당시 경인전철 때문에 벽에 가로박혀 벽 너머에 사는 사람들이 병원에 가기 위해 고생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때 생각했죠. ‘이 장벽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요."


이후 그는 정치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봐왔던 경인전철 복원화사업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다. 세계 사례도 찾아보며 경인선 지하화 추진운동본부도 만들었다. "서울시 구로동부터 인천역까지는 36.7km입니다. 전체를 지하화 하는데 1km당 2천400억원, 전체로 보면 8조4천억원이 들어갈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다만 들어가는 비용만 보지 말고 전체 기회비용을 봐야한다고 봅니다. 미래로 보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이익이 발생하거든요."


 "삼보기술사에서 연구한 결과를 보면 철길 주변에 남는 땅이 150만평이고 철길 주변에 저평가된 땅까지 생각하면 그 이익은 대단합니다. 구로, 부천, 부평, 주안에 이르는 거점 도시 개발과 되돌아오는 땅까지 8조4천억원을 들였을 때 되돌아오는 가치는 수십조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개발이 아니라 복원입니다. 도시가 팽창이 되면서 철길은 이제 도시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장벽이 돼버린 것이죠. 인천의 남북을 가로막은 이 장벽은 도시발전의 저해요소가 됐습니다. 이제는 국가에서 시민들에게 되돌려 줘야하는 땅입니다."


정화조 청소업 협동 운영 합의 이끌어


지난해 11월27일 인천시 남동구 12개 정화조 청소업체중 11개 업체는 ‘남동구 정화조 청소업 협동 운영 합의계약서’를 이끌어냈다. 이 합의를 주도한 사람은 김 전 의장이다. 그 배경에 대해 김 전 의장은 "정화조 청소와 관련한 요금은 각 지자체의 조례에서 규정하도록 하고 있는데 인천 남동구에서는 1996년 조례 지정 이후 18년 간 1톤당 1만1천350원으로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조례가격 마저도 업체 간 과다 경쟁으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어 업체들은 존폐위기까지 몰려 있더군요."


"2년에 한 번씩 원가계산을 해서 계약을 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실제 인천발전연구원에 용역 결과를 보니 톤당 2만974원이 나왔습니다. 조례가격도 터무니없이 낮은 상태에서 이보다 더 낮은 가격에 일을 해왔던 것이죠. 제 목적은 이들이 먹고 살 수 있게 경영악화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는 것과 정화조 청소의 원래 목적인 수생태계 보호를 생각했던 겁니다. 제 가격 받고 일하고청소는 명확히 했으면 하는 그런 바람에서 이 합의를 추진한 것입니다."


누구나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


현재 의원직에서 물러나 있으면서도 인천시민들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김 전 의원은,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등수는 같은 선상에서 경쟁을 해서 나눠야 하며 그러면서도 앞서 가는 사람이 뒤에 가는 사람을 배려하는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지방의회에서 조례를 만드는 것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그는 조금 더 넓은 무대로 나아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 전 의장은 국회의원 출마 예비후보로 활동할 때 두 가지 공약을 내세운바 있다. 의결에 가장 많이 불참할 수 있다는 것과 의회식당에서 365일 밥을 먹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약을 내세운 이유에 대해 김 전 의장은 "국회 앞 수많은 사람들목소리를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항상 듣겠다는 것입니다. 또 모르는 법안 가결에는 명확히 판단하지 않고 거수하지 않겠다는 뜻이고요."


수 많은 역경을 헤치며 환갑(還甲)을 목전에 두고 정치인으로 더 큰 꿈을 꾸고 있는 김 전 의장은 인터뷰 내내 소년(少年)의 순수한 꿈과 열정을 느끼게 했다.


MeCONOMY Magazine February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