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살충제와 농약을 피해 도시의 밀원(蜜源)으로 들어온 수백만 마리의 도시 꿀벌이 품질 좋은 도시의 꿀을 만들고, 파산선고를 받은 어느 도시에서는 해체된 건물터에 포도나무를 키워 깔끔한 맛의 포도주를 만든다. 또 다른 도시에선 도시 상공에 떠다니는 효모를 모아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빵을 만드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를 걷어 내고 흙을 숨 쉬게 하면 일어나는 놀라운 흙의 건강 처방전을 받아보시라. (The New York Times Style magazine/2021년 3월 27일 자 참조)
도시의 해체된 건물터에 조성한 포도밭, 그 포도로 빚은 포도주 의 맛은?
수 세기 동안 프랑스인들은 포도가 생산되는 자연환경을 표현하기 위해 ‘테루아르, terroir’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다. 라틴어인 ‘terra’ 즉, ‘땅’이란 말의 기원은 전통적인 시골의 풍경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전통적인 시골의 농업이 과거의 일로 희미해져 가면서 그 단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은 되레 열렬해 졌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도시에 산다. 추정치긴 하나 8억 명이 어떤 형태로든 도시 농업에 종사함으로써 우리가 먹고 있는 농산물의 5분의 1을 생산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도시 농업 종사자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농업의 개념과 신비스럽기만 한 농업의 기원을 측정하는 눈금을 다시 조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맨스필드 프레지어 씨는 2010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시에 있는 그의 포도밭에 「샤토 휴」라고 자신이 명명한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도시 거주자들이 도시의 공터, 건물 옥상, 그리고 집 뒤꼍을 농장으로 바꾸자는 ‘도시 거주자의 농장 만들기 운동’에 참여한 일원이 되었다. 이 운동은 미 전역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데 도시 재생이란 목적을 위해 정부가 제공하는 지원금 혜택이 도시민들의 참여를 고무하는 측면이 있다.
그는 지나다니는 차들이 내뿜는 배기가스로 인해 작물이 성장 장애의 피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변에서 포도나무가 어깨 높이까지 자란다면 정말 운이 좋은 일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우려와 달리 포도나무가 땅에서 점프하듯 크더라니까요”라고 하며 포도나무의 키가 첫해에 12피트(3.6m)까지 자랐던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그렇게 된 것은 이곳의 흙이 포도나무에 최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밝혀졌다. 즉, 모래가 많은 부드러운 흙으로 보온이 잘 되고 배수가 원활했다. 흙이 좋다 보니 흙에 사는 미생물의 활동이 활발해 뿌리가 깊이 내려가고, 병충해를 예방하는 물질까지 만들어 뿌리가 흡수하게 함으로써 병충해에 강한 건강한 포도나무로 성장하게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산 비료를 약간 주었을 뿐이고, 나머지는 포도나무가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샤르도네 (chardonnay, 백포도주의 일종. 혹은 그 포도나무)를 만들자는 꿈을 가졌지만 비니페라(vinifera, 유럽 포도나무) 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수 있는 오하이오주에서 기르기엔 너무 연약하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들었다. 그래서 추위에 강한 잡종인 트라미네트(Traminette) 종과 프론트네(Frontnae) 종을 선 택했는데 자신의 포도밭 보다 훨씬 큰 오하이오주의 시골 포도밭이 대부분 수확을 포기했을 때, 자신이 심은 포도나무들은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 남았다고 했다.
물과 가깝다는 게 핵심이었다. 오대호의 하나인 이리호(Lake Erie)가 그의 포도밭에서 북쪽으로 2마일(약 3.2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리호에서 불어온 바람은 차가운 공기를 유지해 포도나무에서 일찍 싹 트는 걸 막아 주고, 여름이 와도 금방 가을 속으로 빠져들어 가버렸다.
그래서 포도송이는 가지에 착 달라붙어 오래오래 익으면서, 수확 직전까지 당도(糖度) 를 최대한 끌어올려 준다. 포도송이가 무제한으로 태양 빛을 받을 수 있도록 그는 체인톱을 가지고 포도밭을 따라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밭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관목을 잘랐다. 그는 포도나무에 물을 대기 위해 스프링클러를 쓸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스스로 거부했다. 왜냐하면, 포도는 참을성이 강했고 비도 충분히 와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신 듯합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포도나무가 자라는 이상적인 흙, ‘테루아르, terroir’
미국의 역사학자 콜린 가이는 13세기의 ‘테루아르’는 단순하게 말해서, 포도나무를 자라게 하는 이상적인 흙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현실적인 수단이었다고 『When Champagne Became French Wine and the Making of a National Identity』 (2003) 라는 그의 책에서 말했다. 겨우 16세기의 끝을 향해 갈 때가 되어서야, ‘테루아르, terroir’라는 단어는 감각적인 의미를 띠었다가 궁극적으로 ‘gout du terroir’란 구절로 바뀌었다. 이 구절은 오늘날 ‘테루아르, terroir’의 의미에 함축되어 있는데 이 구절은 포도를 소개할 때 어떻게 하면 포도의 원산지를 반영할 수 있을까, 아니면 포도를 자라게 한 흙의 맛을 어떻게 표현하면 알아듣기 쉬울까? 등을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 ‘테루아르, terroir’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니면 그 런 말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사람이 많을 성싶지 않다. 아마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부 사람들은 ‘테루아르, terroir’라는 말은 자연 생태학적 조건 -흙의 화학작용(영국의 포도주 작가, 휴 존슨은 ‘뿌리가 새카만 어둠 속에서 빨아들이는 것’을 화학작용이라고 묘사했다), 수분과 햇빛의 정도, 기후, 해발과 고도, 지형 등고선(等高線), 주변의 식물 다양성- 으로 한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조건들은 포도주 제조자가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 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포도주 제조자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조건의 정도를 더 높일 수는 있겠지만 조건을 높였다고 한들, 근본적으로 포도주 자체의 본질을 높일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흙에서 시작된 미네랄이 최종적으로 포도 알을 압착 할 때까지 전송된다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대신, 그들은 이 말을 ‘인간이 흙에 바치는 노동과 지식, 인간이 영혼의 뭔가를 흙에 전해주고자 하는 포도주 제조자와 흙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등 인간과 흙이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 다시 말해 유일한 자연인 흙’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니까 ‘테루아르, terroir’는 단순히 인간에게 먹을 것을 조달하는 담당자가 아닌,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파트너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흙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슬리고 달래서 얻어야만 하는 것
어느 쪽이 됐건 ‘테루아르, terroir’는 얻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수십 년에 걸쳐, 혹은 수 세대 동안 구슬리고 달래서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 우, 포도주 제조는 BC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프레이저 씨는 긴 줄을 세워야 할 만큼 많고 많은 포도주 제조자 출신이 아니다. 올해 77살인 그는 시인인 「랭스턴 하이즈(Langston Highes)」가 첫 번째 시를 쓴 흑인 이웃 동네 센트럴(Central)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자랐다.
잘 나가는 도박 사업체를 부업으로 가진 교회 집사이자 술집 주인의 아들인 프레이저 씨는 처음엔 파이프 용접공이 되었다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기를 신용카드 사기에 특별한 재주를 가진 ‘직업 위조범’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감옥에서 그는 문자언어에 관심을 가졌다. 1995년, 그의 수필집이 『From Behind the Wall; Commentary on Crime, Punishment Race, and the Underclass by a Prison Inmate』라는 제목을 달고, 미네소타에 근거지를 둔 출판사 파라곤 하우스(Paragon House)에서 출간됐는데, 출판사는 당시 저자인 그를 “우리를 현대 미국의 불지옥으로 초대하는 현대판 고대 로마시인 버질(Virgil)과 같은 시인”이라서 캐스팅 했노라고 소개했다. 그의 책이 나오고 수년 뒤에 프레이저는 클리블랜드시의 자기 집으로 와서, 마지막으로 인구조사를 했던 2010년 현재 주민의 94%가 흑인인 휴(Hough)에 정착했다. 휴는 클리블랜드시에서 가장 가난한 이웃들이 둘러싼 곳으로, 이 거리는 여전히 역사적인 폭동 -“나는 폭동이 아니라 봉기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지요”라고 그가 말하는- 상처를 품고 있다.
1966 년 7월이었다. 그 사건은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떨 때 일어났다. 한 흑인 남자가 백인 소유의 카페에 들어가 물 한 컵을 달라고 했다가 거부당했을 때 시작되었다. 한 달 후 발표된 한 대배심원의 보고서는 잘못되었어도 한참 잘못된 논리를 폈다. 즉 공산당원에게 사주를 받아 “훈련되어 있고 잘 배운 전문가”가 선동한 폭력이었다는 거였다. 이런 논리는 흑인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를 경찰이 살해하자, 흑인을 과잉 진압했다면서 항의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외부 선동가들”이라고 혐의를 씌운 짓과 다르지 않았다.
프레이저 씨는 자기 부인과 함께 집을 짓고 비영리조직을 만들었다. 재소자들이 사회에 재진입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였다. 마침 그가 마약 거래의 온상이라고 의심하면서 유심히 관찰해 오던 길 건너 아파트 빌딩이 헐렸다. 그는 연방정부 보조금을 받아 건물이 헐린 터를 도시의 포도밭으로 바꿨다. 이전에 인근 사회 복귀훈련 시설에 들어갔었던 사람들을 불러서 포도나무 줄기가 뻗을 수 있는 시렁을 만들고 포도 나무를 심을 수 있게 도와줬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샤또 휴’ 포도주, 빙하호수가 만든 흙에서 탄생
샤또 휴(Chateau Hough) 포도주로 건배합시다 - 프레이저가 가장 좋아하는 포도주는 산뜻한 맛과 단맛이 도는 사시 (Sassy)라는 이름을 가진 화이트 포도주다- 이 포도주의 맛은 수천 년 동안 오하이오주를 덮었던 빙하 호수가 만든 영양분과 미생물이 풍성하고 기름진 흙에 빚을 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1966년 이 거리를 유린(蹂躪)한 것에 대한 분노의 불길 덕일까? 혹은, 포도나무를 가꾸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 덕분일까?
“포도나무가 이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알 리가 있겠어요?”라고 프레이저 씨는 말한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모르더라도 그는 알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온갖 종류의 식음료에 ‘테루아르, terroir’를 들먹이고 있다. 이를테면, 벨벳처럼 아주 부드럽게 마감한, 베네수엘라 해변에서 온 초콜릿이라든가, 일본 홋카이도에서 온 얼음처럼 차갑고 색깔이 청명한 성게를 칭송하기 위해 붙인다. 그러나 ‘테루아르, terroir’는 그 말을 붙였다고 언제나 바람직한 결과를 얻는 건 아니었다. 지질학적 관점에서 엄격하게 따진다면, ‘테루아르, terroir’가 주는 장점이 있겠지만 단점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Tasting French Terroir; The History of an Idea』 (2015년)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미국의 학자, 토마스 파커가 쓴 책인데, 이 책에서 그는 흙냄새가 너무 강한 것은 포도주가 조악(粗惡)하기 때문이고, 그런 냄 새가 나는 포도주를 모독한 프랑스인의 논문이 16세기에 이미 나와 있었다고 암시했다. 흙냄새가 난다는 느낌의 표현은 1964년에 발간된 『Encyclopedia of Wine』에서도 나오고 있 다. 그 책은 미국의 유명한 포도주 수입업자이며, 수입 포도주 예찬자인 프랭크 쓘메이커가 편찬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gout de terroir’를 “흙냄새, 다소 불쾌한 것”으로 정의를 내리고 “최상급 포도주는 그런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테루아르, terroir’는 넓은 의미에서 원산지를 뜻하는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지금 법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어느 특정 지역에서 나오는 포도주의 가치가 그것과 유사한 다른 포도주로 인해 저하되는 걸 막기 위해 마련한 시스템 속에 성문화되어 있다. 말하자면, 1927년부터 거품이 나는 포도주는 어떤 제품이건 원료로 쓰인 포도가 프랑스 북동쪽 샹파뉴 포도 재배지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샹파뉴 라고 불러서는 안 되도록 규정했다.
포도주는 아니지만 프랑스 남부, 로께포르-쉬르-술종(Roquefort-sur-Soulzon)의 동굴에서 만든 로께포르 치즈에만 로께포르라는 지역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법령으로 공포된 것은 1411년이 처음이었다. ‘테루아르, terroir’는 이처럼 원산지를 지키기 위해 나오긴 했지만, 마케팅의 도구이자 국수주의적 의미가 함유된 문화적 성명(聲明)이고, 테루아르의 글자가 가진 의미대로 흙을 지키겠다는 약속이다.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의 손으로, 노동의 가치를 알려주는 도시 농업
미국은 프랑스에 비하면 젊은 나라다. 그 대신 당신이 만든 포도주가 태어난 곳 - 혹은 어디 산이 됐든지, 어느 지역의 이름이든 붙일 수 있는데(설령 포도주가 다른 지역에서 나왔을 지라도)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떻게 포도나무를 키우고, 그 포도로 포도주를 만드는데 얼마의 시간이 들어갔는가 하는 바로 그 시간을 신화처럼 여기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 포도주의 특성을 말한다면, 한 마디로 미국은 ‘테루아르, terroir’를 어떤 지역에 고정적으로 붙이지 않는다는 것 이다. 심지어 그런 말 - 지역을 앞장세웠다가는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말 - 지역이 가지는 확실한 것이 있다.
그 말 - 지역이 붙으면, 그 포도주가 남달라 보인다. 미국에서 ‘테루아르, terroir’라는 말은 그러니까 느긋하고 자유롭다는 느낌을 주긴 해도, 프랑스처럼 농촌 전원에서 부르는 목가(牧歌)를 떠올리게 하는 건 아니다. 은유적 표현 을 빌리자면 (어느 한 곳에) 뿌리박고 있는 상태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2차 세계 대전에 뒤이어 산업화의 바람이 불면서, 가공되고 불안하기 짝이 없이 재료를 획일적으로 생산해 출생지가 불분명해진, 이른바 “생산자의 얼굴이 없는” 식품이 미국 가정을 뒤덮었으니, ‘테루아르, terroir’는 그런 가공식품의 독을 제거해주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문화 인류학자인 「아 미 트루벡」은 『The Taste of Place: A Cultural Journey Into Terroir』(2008)에 쓰고 있다.
이렇게 대량 생산되어 값이 싸고 양이 넘치는 상태를 만들어 배고픔과의 종말을 선언했지만, 우리를 사람답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를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됐다. 그것은 우리와 연결된 환경을 희생시키는 것이었고,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손으로 해결한다는 노동의 가치를 희생시킨 것이었다. 우리가 그런 걸 잃어버렸다면, ‘테루아르, terroir’는 결국 특별한 제품과 (특정한 이름이 붙지 않는) 일반적인 제품을, 회사에서 생산한 제품과 개인이 만든 제품을, 지방 특산 농산물과 어디에서든 나올 수 있는 농산물을 구분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의 수돗물과 흙에서 자란 밀, 그리고 뉴욕의 공기에서 포집한 효모
그렇다면 장소에 따라 맛이 다른 것일까? 39살인 제빵사 겸 예술가인 노라 리드구스는 맨해튼에 있는 한 식당 -미슐랭 별 3개를 받은- 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장으로부터 딱 빵 한 조각만을 만들돼 이 세상에서 최고 가는 빵 한 조각을 만들어달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세계에서 최고가는 빵을 만들기보다는, 오로지 뉴욕에만 있는 빵을 만들 각오였다. 그녀는 살균 소독한 항아리에 시큼한 맛이 나는 반죽 발효종을 채웠다.
반죽 발효종은 뉴욕주 수돗물로 재배한 밀과 그 밀가루를 수돗물로 혼합해 만들었다. 이때 쓰인 밀은 도시 주변에 심은 것이었는데, 공기 중에서 야생효모를 흡수하고, 통행인들이 옮겨주는 미생물의 도움을 받고, 좁은 공간에서 복작대는 도시 생활에서 나오는 온갖 것에 붙어 있는 미생물을 빨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밀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오기 훨씬 전에 재배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미생물 활용 운운할 때 그놈들이 왔었다)
발효종이 담긴 항아리 가운데 한 개는 센트럴 파크 남쪽 끝으로 가져갔다. 거기에 두고 키오스크 매점의 한 경비요원에게 지키도록 했다. 또 다른 항아리는 뉴욕시 Upper East Side 거리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4층, 개인 식당 밖에 세워 놓았다. 세 번째 항아리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장 위험한 것이었는데 밧줄로 묶어 Brooklyn 다리의 교각(橋脚)에 달린 기둥 하나에 매달아 두었다.
그녀는 2주 동안 매일 항아리를 둔 장소로 가서 발효 종을 덮은 무명천 덮개를 들어서 밀가루 반죽의 먹이와 수돗물을 주었는데 누가 보지 않을 때, 교각 기둥에 매단 항아리를 신중하게 확인했다. (그녀는 다리에서 항아리를 매달고 확인 하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시청에 허가를 요청했으나 시청의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빵을 구울 때가 되어 각 항아리에 든 반죽 상태를 확인해 보니, 메트로폴리탄 항아리의 반죽 은 부드럽게 그리고 적당히 편안하게 부풀어 있었다.
“이런 반죽으로 만든 빵은 식사하면서 포도주와 함께 먹는 것이지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반면 센트럴 파크에 둔 항아리의 반죽은 꽃처럼 피어올랐고, 껍질이 딱딱한 편이었으며, 반죽의 끝 부분이 약간 울퉁불퉁했다. Brooklyn 다리에서 두었던 항아리의 반죽은 가장 많은 알코올을 함유하고 있었는데 알코올 성분이 많은 반죽으로 빵을 만들면 단맛이 많이 난다. 그래서 이 반죽에는 씨앗과 호밀을 첨가해 단맛의 균형을 잡았다.
항아리의 반죽이 모두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또 다른 항아리를 Gowanus 운하 근처에서 두었었는데, 운하 근처라고 하는 그곳의 정체성을 반죽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 대신 빵을 만들어 보니 그녀는 아서(Arthur) 왕의 반죽 채비를 연상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된 원인이 자신이 운하 근처에 항아리를 설치해 놓고 나서 자신과 이웃 간의 인간적 연결을 소홀히 한 탓이 아니었겠냐고 했다)
“제빵사가 된다는 것은, 반쯤 완벽주의자가 되고, 반쯤 운명에 순종하며 영원한 변화의 과정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Brooklyn 다리에 항아리를 매달아 놓았을 때 그녀는 어떤 불확실한 느낌이 왔었다. 그건 다리 위에 매단 항아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알 수가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다리 위를 지나다니는 많은 차량, 그리고 공중을 나는 새들이 항아리로 날아와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어찌 알겠냐는 것이다. 게다가 다리 위에서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을 것이고, 바람에 흔들리고 밀리고 했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다리 밑에 밧줄이 매달려 있는 것을 알아채고, 그걸 잡아당겨 항아리 안에 뭐가 있는지 엿보지 말란 법이 없었다.
시큼한 반죽은 사실상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마시는 공기를 마시면서 우리와 한 패거리가 되고 있었다. 뉴욕시의 두 자치구가 합류해 교통량이 많은 지점이라, 항아리를 갖다 놓지 못했지만, 그러긴 해도 다른 항아리의 반죽에 전 세계의 미생물이 초대되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누구든- 뉴욕 거기에 있지?”라는 질문은 그녀가 뉴욕에 붙이는 시(詩)였다. 그것은 그녀가 뉴욕이 혼란스럽다면서도 “저는 제가 사는 이 도시가 지저분해서 좋거든요”라고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흙과 바람의 ‘테루아르, terroir’, 그 미세한 차이가 ‘한국의 손맛’
‘테루아르, terroir’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만 있는 유일한 개념이고, 다른 문화에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그것과 상응하는 말이 없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건 오해다. 중국어의 펑투(風土)와 일본어의 후도(ふうど,風土)는 -글자 그대로 ‘바람과 흙’으로- 지리와 기후가 지역과 그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특성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그리고 그 특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단어다.
그 단어와 더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말이, 한국어의 ‘손맛’이다. 이를 해석하자면 ‘당신의 손맛’이란 의미로, 음식 맛은 음식을 누가 만드느냐, 그 사람의 손길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까 한국어의 손맛이란 아주 세밀한 ‘테루아르, terroir’인 셈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각자 개인 특유의 ‘테루아르,terroir’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리드구스의 뉴욕 프로젝트」 를 위해, 그녀가 예술계로부터 테루아르라는 용어 하나를 빌려온 이유는 “시큼한 반죽을 각기 특정한 장소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자 했다. 만약 그 반죽을 가지고 다른 곳에 가서 빵을 만든다면, 그녀가 뉴욕에서 한 실험의 의미는 상실되고 말 것이다.
파산한 도시의 밀원(蜜源)에서 벌꿀들이 만드는 보약(補藥)
치커리와 토끼풀(클로브), 민들레와 유액을 분비하는 박주가리, 개박하와 산사나무, 뽕나무와 야생 능금, 이런 초목은 디트로이트시에 사는 꿀벌들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향연(饗 宴)이다.
디트로이트시에는 6만에서 7만 개의 공지(空地, 빈 땅)가 있는데, 이런 땅은 거의 도시 면적의 3분의 1에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살지 않는 이런 공터마다 꽃이 만발해 있고, 다년생 식물인 호랑이 백합이나 과꽃이 버려진 집 뒤편의 흙에서 싹이 나와 저들이 가야 할 길을 허공에 내면서 크고 있다.
2013년, 디트로이트시는 파산했다. 천8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지방자치단체가 도산(倒産)을 선언했다. 37살의 니콜 린드세이와 36살의 티모시 폴은 그들의 이웃들이 공공서비스가 말라버리는 현장을 목격하며 살았고, 노동계급 주민들의 목소리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던 도시 재생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도 보고 들었다.
2017년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폴이 말한다- 그래서 340 달러를 주고 디트로이트시에 있는 3곳의 땅뙈기를 사서 그 곳에 벌꿀 통을 놓았다.
오늘날 두 사람은 비영리적 모험인 디트로이트시에서 벌꿀통 놓기가 성공해 13곳으로 확대했다. 지역 학교와 공동체 텃밭과 벌꿀 파트너십도 맺어 3백만 마리 이상의 꿀벌을 돌보고 있다. 꿀벌의 숫자가 전국적으로 급전직하로 줄어든 지난 10년간 매년 겨울이 되면, 미국의 양봉업자들은 기존 꿀벌 군집의 4분의 1에서 절반 사이를 잃었다고 과학자들은 이곳 사정과는 반대로 말하고 있다.
시골 지역의 꿀벌들은 이따금 살충제 폭격을 때리는 데다 농민들이 밭에 단일 품종만 재배하는 걸 견뎌야 했던 상황이었다. 도시의 공터, 으레 음침한 도시의 상징으로 생각되던 그런 장소에는 누구한테 방해를 받지 않고 무성하게 자라는 생명으로 가득한 풍요로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한 도시의 풍요로움은 꿀벌의 생존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극히 지역적인” 꿀맛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폴은 말한다.
꿀 맛은 계절에 따라 바뀐다. 봄철 꿀맛에는 박하 맛이 난다. 박하 맛이 디트로이트시의 벌꿀이 가진 ‘테루아르, terroir’이다. 가을철 꿀맛은 클로브와 매역취(goldenrod)의 향기를 풍긴 다. 신토불이, 특정 지역에서 나는 것을 특정 지역 사람이 먹는다는 말은, 기후변화에 대한 그리고 해안에서 해안까지 농산물과 가축을 운반하는 대형 트럭을 보고, 미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의 현대식 기도 주문(呪文)이다.
그 주문은 또한, 특정 지역(혹은 장소)의 사상을 담은 헌신(獻 身)이다-우리가 어떤 공간을 변형하고, 그 속으로 뚫고 들어가 보면, 원래 그곳이 우리가 사는 장소이고, 그 장소가 지역이 되고, 그 지역은 도시가 되거나 도시의 한 구역이 된다. 그곳이 시골이 아닌 도시라도, 그런 벌꿀을 생산해 먹는 것 은 그 지역에서만 나는 벌꿀을 먹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지역 주민이 된다. 여러분의 몸은 어쩌면 여러분 주변에서 자라는 꽃과 나무로부터 나오는 꿀과 꽃가루의 자취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역에서 나오는 꽃과 나무와 조화를 이루어야 여러분의 면역체계가 좋아져 알레르기 반응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폴」은 디트로이트시에서 채취한 꿀을 먹고, 자신의 마른기침이 몇 달 만에 그쳤다고 말했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는 신토불이(身土不二), 흙이 곧, 우리다
우리를 한 장소에 배처럼 정박(碇泊)하게 하는, 다시 말해 우리를 이 세상의 어느 한 곳과 이해관계를 가지게 하는 ‘테루아르, terroir’의 참 목적이 이것일지 모른다. 프랑스의 사회이론가인 앙리 르페브르는, 1968년 5월, 파리에서 학생 시위 직전에 쓴 짧은 글을 통해 항의와 투쟁의 물결이 일어날 수 있도록 촉매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해 프랑스가 멈췄고 유명한 ‘도시의 권리’ -도시 환경을 조성할 때 발언할 권리를 가지며 사용권과 기쁨이 이득에 앞서 특권으로 주어지는 한 장소에서 살 권리- 를 선언하게 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영국의 사회이론가이며 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베이는 도시의 권리에 관한 생각을 확대했다. 도시 자원에 대한 권리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즉 “우리는 도시와 우리 자신을 만들고 또 다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이다. 어느 장소에 속해 정주한다는 것은 주소를 가지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가상이긴 하지만 지구촌 시민권에 대한 요구가 이웃이란 물리적 현실보다 우선권을 얻어 감에 따라 특정한 한 장소에만 속하기는 더욱 더 힘들어졌다.
클리블랜드시, 디트로이트시와 뉴욕시와 같은 도시에서, 이웃은 절대 항수 (恒數)가 아니며 그런 항수가 주어지지도 않는다. 도시는 늘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들과 전쟁하고, 한 장소를 빙빙 돌도록 하며,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도심 인근의 낙후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외부인과 돈이 유입되고, 임대료 상승 등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 혹은 부동산 개발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자본의 침투와 비상 상황을 방어까지 해야 한다. 그런 일이 생기면, 우리와 친숙해 졌던 길을 지워버리게 될 것이다.
「투르벡」은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 그것이 우리를 만든다”고 썼다.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우리 지역에서 생산되는 식품 재료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장소의 맛을 운운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가 정착하는 우리의 장소를 만들어야만 한다.
집 뒤꼍의 장독대, 우리나라의 ‘테루아르, terroir’다
우리나라의 농어산촌의 동네마다, 집마다 뒤꼍에 두었던 장독대를 생각해 보자. 그 장맛은 집마다 다르지 않았던가? 수천 가지 맛을 내는 장독대를 부활시키는 누군가의 발효 영웅이 나타난다면, 도시 농촌 가리지 않고 장독대를 만들어 수천 년 이 땅에서 전래한 우리나라 발효음식을 전 세계인의 식탁에 올려놓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MeCONOMY magazine August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