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동두천 25.2℃
  • 맑음강릉 28.2℃
  • 맑음서울 26.0℃
  • 맑음대전 25.7℃
  • 맑음대구 28.5℃
  • 맑음울산 26.1℃
  • 맑음광주 26.9℃
  • 맑음부산 26.5℃
  • 맑음고창 23.9℃
  • 맑음제주 26.4℃
  • 맑음강화 23.3℃
  • 맑음보은 25.3℃
  • 맑음금산 25.7℃
  • 맑음강진군 28.0℃
  • 맑음경주시 29.0℃
  • 맑음거제 26.3℃
기상청 제공

이사람

당신을 억만장자로 만들 때 하늘이 내리는 시련

창업자 이야기

안경 하나로 기업을 일으켜 사망 당시 순 자산만 241억 달러,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 전 세계적으로 치면 52번째의 부자가 된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델 베키오(1935~2022)」의 부음기사를 읽다가 문득 “하늘이 장차 큰일을 맡기려 하는 사람에겐 시련을 내린다”는 맹자의 말과 2천백 년 전 사기(史記)의 맨 마지막 권(卷)에 부자들의 이야기인 ‘화식열전(貨殖列傳)’을 쓴 사마천의 말이 떠올랐다. 고인이 된 「레오나르도 델 베키오」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보고 ‘화식열전’에 등장한 2천 년 전 부자들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將降大任於斯人也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하면

必先勞其心志
반드시 먼저 그가 마음의 뜻을 세우기까지 괴로움을 주고

苦其筋骨
그 육신을 피곤케 하며

餓其體膚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窮乏其身
그 몸을 궁핍하게 한다.

 

行拂亂其所爲
그가 하려는 바를 힘들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是故動心忍性
마음을 쓰는 중에도 흔들리지 않을 참된 성품을 기르고,

增益其所不能
불가능하다던 일도 능히 해낼 수 있도록 키우기 위함이다.

 

맹자(BC 372~BC 289), 공자 사후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나 전국시대에 살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50세가 넘어서 시작했던 편력(遍歷, 이곳저곳을 돌아 다님)을 끝내고 70세 무렵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토론 했다. 그때 만들어진 책이 맹자 7편이다.


흙수저를 탓하지 말라
난 고아원(孤兒院) 출신이나 이탈리아 2번째 부자다


Leonardo Del Vecchio(레오나르도 델 베키오)는 이탈리아의 백만장자다. 그는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가난뱅이 출신에서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거대한 기업을 세워 따분하고 조각으로 분산돼 있던 안경가게를 거대한 안경 산업으로 키우고, 안경 산업을 패션 지향의 사업으로 바꿔 놓은 경영자다.

 

그가 지난 6월 27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87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소식은 그가 회장으로 있는 Essilor Luxottica라는 회사가 발표했다. 사망 원인은 밝히지 않았다. 이 회사의 여성 대변인은 그가 San Raffaele 병원에서 사망했다고만 알렸다. 비록 Luxottica라는 회사는 안경 산업계 외에는 잘 모르지만, 안경업계에서는 오랫동안 이름을 알려왔다.

 

마치 구글이나 아마존이 그들의 분야에서 지배력을 이룩한 것처럼 안경 산업에서 이 회사의 지배력은 막강하다. 이 회사는 고급 브랜드인 이를테면, 「Ray-Ban」, 「Armani」, 「Bulgari」, 「Chanel and Brooks Brothers」와 같은 브랜드의 안경을 만들며, 자사가 소유한 「Pearl Vision」, 「Lenscrafters」 그리고 「Sunglasses Hut」와 같은 소매 안경 체인점을 통해 고급 안경을 판매한다. 시작은 델 베키오가 60년도 더 이전에 이탈리아 아고르도 Agordo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시작했다. 그리해 유럽, 아시아, 미국에 공장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안경 제조업자가 되었고, 이탈리아의 최고 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포브스지가 올해 세계 최고 부자 순위를 매겼는데, 그와 그의 가족은 52 번째였다. 그가 가진 순 자산가치는 273 억 달러일 것으로 추산했다. 이탈리아 Mario Draghi 수상은 한 연설에서 델 베키오 회장을 ‘이탈리아의 기업가정신 분야에서 지도자적인 인물’이며 ‘위대한 이탈리아인’이라고 부르고 “그는 아고르도 Agordo 지역사회와 전국에 혁신의 중심 세계를 들여놨다”고 말했다. 

 

강둑 위에 세운 집과 공방에서 오로지 안경테 만드는 일에만 몰입했다


1935년 5월 22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그는 고아원(孤兒院)에서 컸다. 그의 아버지는 거리에서 채소를 파는 행상이었으나,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미 다른 4명의 자녀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살필 수 없었다.

 

그는 14살 때 금속 세공 가게에서 도제 수업을 받고 안경테 부품을 만드는 공방으로 옮겼다. 그는 “나는 사환으로 시작했다”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회사에서 만든 동영상에서 회고하 며 “당시 공방 사람들은 나를 레오나르도 Leonard라 부르지 않고, 그냥 ‘어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1961년 그는 이탈리아 북동 방향에 있는 작은 도시 아고르도 Agordo로 이사 해서, 그곳에 자신의 공방을 열어 안경테 부품을 만들었다. 이 도시는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토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가족을 위한 집과 붙어 있는 햇 병아리 사업체인 Luxottica를 강둑 위에 세웠다. 자신의 일과를 새벽 3시에 시작한 그는 오로지 안경테 만드는 일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일을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입맞춤도, 포옹도 해 준 적이 없었어요”라고, 그의 큰 딸인 Marisa De Vecchio가 1991년 Luxottica가 발행한 델 베키오 씨의 공식 자서전 『선견지명이 있는 남자』에서 회고 했다 . “솔직히 우리는 그를 무서워했어요.” 

 


델 베키오 씨는 자신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해 준 두 가지의 혁신을 생각해 냈다. 부품 생산을 포함한 그 부품으로 완제품 안경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안경을 전 세계적인 소매판매점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하는 거래 구조를 자신이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안경류와 패션 브랜드와 결혼(結婚)을 개척하고 실용적으로 필요한 것을 구찌 핸드백만큼이나, 혹은 에어 조단 운동화만큼이나 소유할 가치가 있는 패션 액세서리로 바꿔놓았다.

 

1998년 「Armani」와 시작으로 향후 20년에 걸쳐 「Ralph Lauren」, 「Chanel」 그리고 12명의 다른 유명한 디자이너들과의 라이선스(특허) 계약에 서명했다. 안경류를 패션으로 높임으로써 그는 어떤 때는 안경 하나당 1,000달러가 넘는 가격을 책정할 수 있었다.


 유명 브랜드와 계약, 소매 유통망을 통해 고급 패션 안경 판매 

 

사업이 성장함에 따라 델 베키오 씨는 기존 경쟁 업체인 「Ray Ban」, 「Persol」, 「Sunglass Hut」, 「Pearle Vision」 그리고 「Oakley」를 인수했다. 1990년에 그는 「Luxottica」를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는 중소규모의 유럽 회사로서는 이례적인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로써 한바탕 인수합병에 필요한 자본과 재정을 주주와 공유할 수 있게 됐다.

 

그가 확장을 결심한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1955년, 오하이오에 기반을 둔 미국 신발 회사 -Luxottica의 시장 가치보다 5배가 큰 대기업- 의 적대적 인수였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그 대기업에서 수익성이 좋은 미국에서 가장 큰 안경 체인인 Lenscrafters 백화점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회사를 14억 달러에 인수했고 「Lenscrafters」를 제외한 모든 회사를 매각했다. 세분화한 시장(시장을 세분화해 고객에게 더 적합한 상품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어디든 진출을 하려고 하면서 Luxottica는 비싸지 않은 안경테를 개발도상국에서 팔았고, 때로는 자선을 통해서 안경을 거저 주기까지 했다. 경쟁사가 벨 베키오 씨의 야심이 어디까지 뻗칠 것인지 낌새를 알아차렸을 때, 그의 회사는 주요 디자이너 브랜드의 80%와 라이선스를 맺고 있었으며 전체적인 안경 산업에서 시장 가격을 좌지우지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70살에 가까워진 2004년에 델 베키오 씨는 은퇴를 선언하고 경영권을 젊은 경영인 안드레아 구에라Andrea Guerra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10년 뒤 Luxottica의 고삐를 다시 쥠으로써 주주들을 놀라게 했다. 이어지는 3년에 걸쳐 분석가들은 델 베키오 씨가 구에라 씨를 몰아내고 3명의 다른 최고 경영자를 임명 했다가 해고했을 때, 그 회사와 창업자의 안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런 혼란의 와중에 델 베키오 씨의 가장 큰 거래가 이뤄졌다. 2017년 81 살의 나이로 그는 Luxottica와 전 세계 맞춤 안경의 절반을 만들었던 프랑스 회사인 「Essilor」 사와의 합병을 발표 했다. 그는 32%의 주식으로 「Essilor- Luxottica」의 회장에 임명되었다. 

 


81살의 나이에 다시 현장에 뛰어든 경영가, 프랑스 기업을 합병


그 회사보다 극도로 작은 경쟁사들로서는 그 거대한 대기업은 악몽이었다. “그 새로운 회사는 기술적으로 독점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가디언지(The Guardian) 가 언급하면서도 “안경이 등장한 이후 7세기 동안 그런 회사는 없었다”고 썼다.

 

델 베키오 씨는 2명의 여성과 결혼을 3번 했고,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첫 번째 부인 Luciana Nervo 와 2명의 딸, Marisa와 Paola, 그리고 아들인 Claudio를 두었는데, 아들은 지금 의류 소매회사인 「Brooks Brothers」 의 최고 경영자다. 그에겐 또 다른 아들인 Leonardo Maria가 있는데, 두 번째 부인인 Nicoletta Zampillo와 사이에 얻은 아들이다. 2000년에 두 번째 부인과 이혼을 한 뒤, 그는 여자 친구인 Sabina Grossi와 두 아들 Luca와 Clemente 를 낳았다. 그러다가 그는 2010년에 Zampillo 부인과 재결합했다. 그녀는 6 명의 자식을 가진 미망인이 되었다. 


「Essilor」를 합병하기 전에도 Luxottica 의 시장 지배력은 커서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고 컬럼비아대학 법학 교수인 팀 우 Tim Wu가 포브스지에서 밝혔다. 하지만 합병이 이뤄졌다고 해서 델 베키오 씨의 야망이 끝난 건 아니었다. 2019년, 그는 화란의 안경 소매기업인 「Grand Vision」의 최대 지분을 획득함으로써 「Essilor-Luxottica」의 소매 네트워크를 종전의 두 배가 넘는 1만6,000개 이상으로 늘렸다. 회사 측은 이 거래를 가리켜 “2050년이 오기 전에 이 세상에서 좋지 않은 시력을 근절하고자 하는 우리의 야망을 향한 또 다른 발걸음”이라고 했다.

 

교역을 잘하는 장소를 찾아가 철 그릇을 만들어 부자가 된 탁씨(卓氏) 


2천여 년 전 중국의 촉나라에서 탁씨라는 사람이 살았다. 탁씨는 그의 조상이 조(趙)나라 사람으로 제철업을 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다. 처음 진(秦)이 조(趙) 를 격파하자 탁씨(卓氏)에게 이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포로가 된 탁씨(卓 氏)로써는 가진 재물을 약탈당하고 부부가 둘이서 손수레를 끌고 이주지로 떠나가야만 했다.

 

탁씨와 함께 이주한 포로들 가운데 다소 돈이 남아 있던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진나라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고 가까운 지방을 요구해 가맹이란 곳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탁 씨만은 가맹은 땅이 좁고 천박하다고 여겼다.  그때 문산(汶山) 기슭에 기름진 들이 있어서 큰 감자가 나며 그걸 먹으면 죽을 때까지 굶지 않을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더구나 그곳 주민들은 장사에 능숙해 교역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곳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뒤 멀리 임공이라는 곳으로 이주해 크게 만족하고 기뻐하며, 철산(鐵山)으로 들어가 쇠를 녹여 그릇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러 모로 꾀를 내 진(秦), 촉(蜀)의 백성을 압도했다. 그 결과 그는 노비 천 명을 부릴 수 있는 돈을 모았을 뿐 아니라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는 즐거움은 임금의 그것에 비교될 정도였다고 한다. 


제철을 생업으로 삼은 정정(程鄭) 

 

정정은 산동(山東)에서 붙잡혀온 포로였다. 그 또한, 제철을 생업으로 해 머리를 방망이 모양으로 틀어 올린 백성(혹시 우리 조상 아닐까?)들과 교역했다. 그 결과 탁씨처럼 부유해져 함께 임공에서 살았다.


배포 있게 제후와 장사를 한 완공씨(宛孔氏)


공씨의 조상은 양나라 사람이었다. 그 는 제철을 생업으로 삼았다. 처음 진나라가 위나라를 쳤을 때 공씨는 남양으로 이주했다. 쇠를 많이 녹여 그릇을 만들었고 큰 연못을 가졌다.  거기(車騎)를 거느리고 제후들을 방문했으며, 그런 기회를 이용해 장사하고 이익을 챙겼다.

 

공 씨가 제후들에게 보내는 선물은 호사스러웠지만, 장사의 이득은 막대해서 인색하고 좀스럽게 구는 장사치보다 훨씬 큰 돈을 모았다. 집에다 몇천 금의 부를 쌓아 놓자, 남양의 장사꾼들은 모두가 공씨의 배포 있는 마음을 본받았다.


대장장이로 입신해 금융업을 한 강씨(剛氏)

 

노(魯)나라 사람들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풍습이 있었다. 노나라 조(曺) 땅의 강 씨는 그중에서도 더 심했다. 대장장이로부터 입신해 억만장자의 부를 쌓았는데도 그 집안의 부형(父兄)과 자손들에게 “엎드리면 물건을 줍고, 허리를 펴면 물건을 챙기라”는 말을 했다. 행상하며 모든 군국(郡國)을 다니며 금전을 꾸어 주었다. 추(鄒), 노(魯)에서는 그 때문에 학문을 버리고 돈벌이에 좇아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오로지 조의 강 씨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이었다.


노예를 사랑해 소금 유통을 시킨 조간(刁間)

 

제(齊)나라 사람은 풍습상 노예를 천대 했다. 그러나 조간은 노예를 사랑해서 정중히 대했다.

교활한 노예는 사람들이 싫어하기 마련이었는데, 조간은 이를 발탁해 생선과 소금 장사를 시켜 돈을 벌어들이게 했다. 조간은 거기(車騎) 를 거느리고 다니며 고을 태수와 서로 교제하는 신분이었지만 더욱 노예들을 신임해 드디어 그들의 협력으로 몇천만 금의 부를 쌓았다.

 

그래서 이르기를 ‘차라리 벼슬해 작록(爵祿)을 받지 말라’는 것은 조간이 뛰어난 종들을 잘 이끌어 부유하게 해주고, 마음껏 그들의 힘을 주인을 위해 다 바치게 한 것을 칭찬한 것이리라.

 


오늘날의 푸드트럭으로 부를 축적한 사사(師史)

 

주(周)나라 사람은 검소하고 인색하지만 그중에서도 사사는 더 심했다. 수백 대의 수레를 이끌고 군국(郡國)으로 나가 장사를 했는데 그는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낙양 시가는 제, 진, 초, 조(齊·秦 楚·趙)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자도 장사 일을 부자들에게 배워 오랜 세월 동안 행상하고 산 것을 서로 자랑하며 가끔 고향 마을을 지나가도 자기 집은 들르지 않았다. 사사는 이런 한 패들에게 장사를 맡겨 시킨 결과 능히 7천만 량의 재산을 축적했다. 


현대판 메이저 곡물상 선곡임씨(宣曲任氏)


선곡의 임씨 조상은 독도(督道)의 창고지기였다. 진(秦)이 패했을 때 호걸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금옥(金玉)을 가졌으나, 임 씨는 창고의 곡식을 굴속에 감췄다. 그 뒤 초(楚)와 한(漢)이 형양(滎 陽)에서 서로 맞서는 동안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자, 쌀은 한 섬에 1만 전 까지 뛰어올랐다. 이 때문에 앞서 호걸들이 차지했던 금옥은 모두 임 씨의 것이 되고, 임 씨는 부자가 되었다.

 

부유한 사람은 사치를 다투지만, 임 씨는 허세를 버리고 절약, 검소하며 농사의 목축에 힘썼다. 사람들은 농사와 목축에 필요한 물건을 살 때 싼 것을 택했지만, 임 씨만은 값이 비싸도 좋은 것을 택했다. 이리해 임씨 집안은 부호로서 여러 대가 지났는데도 임씨 집안 사람들은 약속하기를 ‘내 집의 농사와 목축에서 얻은 것이 아니면 입고 먹는데 쓰지 않고,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는 가풍을 지킨다고 했다. 이런 까닭으로, 임 씨는 향리의 모범으로 우러름을 받고 집안은 더욱 부유해져서 천자까지 이들을 소중히 여겼다. 


말을 키워 부자가 된 교요(橋姚)

 

한(漢)이 흉노를 쳐서 쫓아내고 변경의 땅을 안정시켰을 때 교요라는 사람만이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말 1,000마리, 소 2,000마리, 양 1만 마리, 곡식 수만 종의 재물을 얻는데 성공했다. 

 

금융업으로 부자가 된 무염(無鹽)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장안에 있는 대소 제후들의 토벌군에 가담하기 위해 이잣돈을 얻으려 했다. 그런데 돈놀이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후들의 봉읍(封邑)은 관동에 있고, 관동이 잘 다스려질지 어떨지 아직 모른다’고 생각해 돈을 빌려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무염 씨만은 천금을 풀어 이자를 원금의 10배로 해 빌려 주었다. 3월에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평정되자, 그는 겨우 1년 동안에 빌려준 돈의 10배를 이자로 받았고, 이로 인해 그의 재산은 관중 전체의 부와 맞먹었다.

 

장사와 도매로 부를 쌓은 전장(田嗇)/ 전란(田蘭)

 

관중(關中)의 부유한 상인과 큰 도매상은 대체로 전 씨 일족이었는데 전장과 전란 등이 그들이다. 이 밖에 위가(韋 家)와 율씨(栗氏) 그리고 안능(安陵)과 두(杜)의 두씨(杜氏)가 거만(巨萬)의 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부호 중 에서도 두드러진 사람들로 특히 뛰어난 존재다. 그들은 모두 작읍(爵邑)이나 봉 록(封祿)을 가진 것도 아니고 교묘한 수단으로 법률을 타서 나쁜 짓을 행해 부자가 된 것도 아니다.

 

모두 사물의 이치를 추측해 행동함으로써 시운에 순응해 이익을 얻고 상업으로써 재물을 쌓 고 부유한 몸이 돼서는 농사일로 돌아가 부를 지켰다. 처음에 과단성을 가지 고 모든 시련에 맞서고 뒤로는 떳떳이 도리를 알고 성과를 지켰다. 변화에는 절도가 있고 순서가 있으니 그래서 족히 꾀를 부린 것이다.

 

농사·목축·공장·벌목·행상·상업에 종사하면서, 임기응변으로 처세해 수익을 올림으로써 부를 이룩한 사람들 가운데 크게는 한 개의 군(郡)을 압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중간 쯤으로 한현(懸)을 압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아래로 향리(鄕里)를 압도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 숫자를 일일이 다 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된 진양(秦揚)

 

무릇 아껴 쓰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삶의 정도이다. 그런데 부자는 반드시 독특한 방법으로 남을 이기는데 농사는 재물을 모으는 데에는 탐탁한 것은 못되지만 진양은 농사로서 주(州) 전체에서 제일가는 부호가 되었다. 


도굴로 부자 된 전숙(田叔)

무덤을 파서 재물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전숙은 그것을 발판 삼아 몸을 일으켰다. 

 

도박으로 부자 된 항발(桓發)
도박은 나쁜 놀이지만 항발은 그것으로 부자가 되었다. 


행상으로 부자가 된 옹락성(雍樂成)

행상은 남자에게 천한 직업이지만 옹락성은 그것으로 부자가 되었다.

 

기름장사로 부자 된 옹백(雍伯)

기름장수는 부끄러운 장사이다. 그러나 옹백은 그것으로 천금을 얻었다. 


술장사로 부자가 된 장씨(張氏)

술장사는 하찮은 장사이지만 장씨는 그것으로 천만장자가 되었다. 


칼을 갈아 부자가 된 질씨(郅氏)

칼을 가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시술이지만 질씨는 그것으로 정식(鼎食)했다. 


위포(胃脯) 장사로 돈을 번 탁씨(濁氏)

위포(胃脯)는 단순하고 하찮은 장사였지만 탁씨는 그것으로 기마 수행원을 거느리고 다니는 신분이 되었다. 


마의(馬醫), 장리(張里)

마의(馬醫)는 대단찮은 처방 기술이지만, 장리는 그것으로 격운(擊運, 운명을 뚫었다?) 해 종과 하인을 부렸고, 저택에 살았다. 


사마천은 자신이 예를 들은 부자들은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돈벌이에 힘썼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로 미뤄 보면 치부하는 데는 일정한 직업이 없으며 재물에도 일정한 주인이 없다.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못난 사람에게서는 홀연히 흩어지고 만다. 천금을 모은 집은 한 도시를 차지한 임금에 맞먹고 거만의 부를 가진 사람은 왕자와 낙을 같이 한다.

 

어찌 소봉(素封)이라 이르는 자가 사악하고 그릇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사마천이 부자 열전을 쓴 지 2,000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부자가 되는 사람의 특징은 거의 비슷한 듯 하다. 그게 무엇이냐고, 그것을 부자의 부음기사로 쓴다면 어떻게 쓰겠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이렇게 요약하겠다. 


“한 가지 일을 선택해 죽을 때까지 오로지 그 일만을 바라보되 세상의 순리를 읽으며 변화할 줄 아는 사람” 


고인이 된 이탈리아의 안경 재벌 델 베키오 회장도 그런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명복을 빈다. 

 

MeCONOMY magazine August 2022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