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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에코경제학(5-1)】 가끔, 서울은 배가 드나들던 항구도시였음을 생각하세요

 

6.25 전쟁으로 한강 하류에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기 전까지 서울은 항구도시였다. 전국의 고깃배와 여객선이 서해 밀물을 뒷심 삼아 한강 뱃길을 따라 마포, 용산까지 들어왔다. 1940년에 찍힌 한 장의 사진은 마포 부두에 수십 척의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고, 아래 위 흰옷을 입은 시민 수천 수백 명이 모여 어시장이 열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2017년, 해군에서 퇴역한 1,900톤급 서울함 등 3척의 함정 (艦艇)이 경인 아라뱃길을 통해 한강으로 진입했다. 서울함은 한강 바닥에 쌓인 퇴적물에 걸려 좌초될 위기를 넘기고 망원 한강공원에 접안(接岸)하는데 성공했다. 

 

그런 서울은 그 옛날 항구의 흔적만 남긴 채 배 한 척도 얼씬거리지 않는 삭막한 아파트의 강변 도시가 되었다. 서해와 서울을 잇는 경인 아라뱃길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박의 왕래가 끊겼지만, 가끔 서울 항으로 배가 드나드는 장면을 상상하며 항구도시의 낭만을 즐길 일이다. 

 

100년 전의 행주 나루는 어땠을까?

 

옛사람들은 행주 나루 아래, 즉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하(交河)에서부터는 바다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강 모두 서해의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밀물이 들면 그 영향으로 두 강의 수위는 1~2m로 높아져 수심도 확보되고, 상류로 오르는 물살을 이용해 강을 타기 쉬웠고, 썰물 때는 반대로 바다로 빠져 나가기 쉬웠을 것이니까 말이다.


구한말(이 기간은 보통 흥선 대원군 1863년~경술국치 1910년까지로 잡는다)에 행주 나루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있었다. 북쪽 뱃길은 해서(海西, 황해도 일대), 평안남도의 진남포, 평안북도 용암포, 의주로 연결됐고, 남으로는 강화, 인천, 태안, 군산, 목포, 부산까지 이어지는 뱃길이 그것이다. 물화집산(物貨集散)을 담당하는 객주(客主) 소유의 황포돛배나, 한강과 서해를 오가며 고기를 잡는 고깃배, 나중에는 한강을 오가는 증기선과 일본 범선 (帆船) 등 많을 때는 하루 수백 척의 배가 행주나루로 드나들었다.

 

제물포항이 열리자 일본 증기선이 들어왔다. 조선의 지배층은 신속하고 안전하게 대량의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는 증기선, 즉 화륜선(火輪船)의 위력을 실감했다. 조선은 1882년 10월 “각국과 통상을 할 때 민간인이 화륜선, 풍범선(風帆船)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여 1883년 이화양행의 남승호라는 사람 이 화륜선을 사들여 상해~부산, 인천~나가사키 항로를 월 2회씩 정기적으로 운항했다.

 

 

황포돛배가 오가던 한강에 동력선인 증기선이 등장한 시기는 1886년. 마포, 행주, 제물포 사이를 운행하던 대흥회사의 세곡 운반선인 증기선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1년 만에 문을 닫았고, 1888년 8월에 조희연의 삼산 회사의 소형 증기선인 용산호(6톤급), 삼호호(13 톤급)가 제물포와 마포 노선에 취항했다. 하지만 한강 뱃길은 조수에 따라 강의 흐름과 수량이 바뀌었다. 게다가 퇴적층과 암초가 산재해 있었다.

 

지금도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바다를 염하(鹽河, 바다의 강이라는 의미) 라고 하는데, 염하를 따라 나 있는 평화누리길을 걸어보면 당시 이 항로가 얼마나 험했을지 짐작이 간다. 결국, 삼호호는 취항한 지 5개월만인 11월, 강화에서 행주 쪽으로 가다가 좌초됐다. 이듬해인 1889년에는 독일계 회사인 세창양행의 쾌속정 제강 호도 그해 9월, 같은 코스에서 침몰했다.

 

조선 정부는 외국 증기선만 가지고는 세금으로 거둔 세곡 (稅穀)을 운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1893년 직접 이운사(利運社)를 설립해 5척의 증기선을 사들였다. 이 증기선으로 세곡뿐만 아니라 일반 화물과 승객도 운송했다. 

 

이 회사에 소속된 ‘전운 환(丸)’은 제물포 부두까지 운반된 미곡(米穀)을 행주, 양화진, 마포, 용산으로 수송했다. 그러나 1년 뒤 1894년 조세가 화폐로 바뀌자 이 회사의 주 수입원인 세곡 운송이 없어졌으므로 소유권이 민간인으로 넘어 갔다.


그보다 앞서 1891년에 미국인 「타운젠트」가 소형기선인 ‘순명호’를 제물포와 마포 사이를 운행하는 등 한강을 오가는 증기선을 활용한, 외국인들의 상업 활동은 청나라까지 합세하면서 제법 활발해졌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마포와 제물포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2,500명 정도였다. 주로 서울에 있었던 외국인들이 부산이나 외국으로 가기 위해 이 증기선을 타고 제물포로 가서, 그곳에서 큰 선박으로 갈아탔다. 

 

MeCONOMY magazine August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