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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M-R&D] 한신(阪神) 교육사건(1)

- 이 코너는 M이코노미 독자에게 제공하는 독서(Reading)와 토론(Debating) 공간입니다.

한신교육사건이란 연합국군최고사령부(General Headquaters)의 지령을 받은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 폐쇄령을 발령하여 일본 전국의 조선학교를 폐쇄한 조치에 대하여 1948년 4월14일부터 4월26일까지 오사카, 효고 등지에서 재일한국인이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하여 저항한 교육운동이다. 

 

 

해방 후 약 2년간은 민족교육의 미래가 밝은 듯했지만 1947년 GHQ지령과 1948년 통첩에 의해 민족교육의 암흑기가 도래했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1947년 4월12일 문부성 학교교육국장은 통첩에서 “조선인이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소학교 또는 상급의 학교, 각종 학교를 신설하는 경우에 부현(府県)은 허가하여도 좋다”고 통지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 통첩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했는데 1947년 5월2일 공포한 외국인 등록령과 관련이 있다. 외국인 등록령은 외국인에게 등록증명서의 휴대와 제시, 퇴거의 강제 등의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외국인의 일본 생활을 감독하기 위한 내용이었다(외국인에 대한 지문날인제도는 1952년 4월 28일 제정된 외국인 등록법에서 ‘14세 이상의 외 국인’에게 의무화되었다). 이 법령에서는 조선인을 당분간 외국인으로 본다고 하면서도(제11조) 한편으로는 일본인과 동 일하도록 처우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술했다. 


일본의 모든 지령 따르라 


GHQ CIE는 1947년 10월의 방침에서 조선인학교는 정규교과의 추가 과목으로 조선어를 가르치는 것 외에는 일본의 모든 지령에 따르도록 일본 정부에 지시했다. CIE의 방침이 일본 정부의 민족교육에 대한 방임적 태도를 통제정책으로 전환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고, 그 후속조치로 1948년 1월24일 문부성의 통첩, 1월26일 조선인학교 교직원 적격심사 명령 등이 통지되었던 것이다.

 

같은 해 3월31일 야마구치현, 4월8 일 오카야마현, 4월10일 효고현, 4월12일 오사카부, 4월15일 도쿄도에서 학교폐쇄가 명령됐다. 전국의 주요 지자체에서 조선인학교에 대한 폐쇄를 명령한 배경에는 3월1일 문부성 학교교육국장의 ‘각종 학교의 취급 에 관하여’의 통지가 있었다. 이 통첩은 무인가 각종 학교가 속출하여 교육상 바람직하지 않는 사태가 생기므로 학교교 육법상 규정되어 있는 각종 학교를 재정의하고자 한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다.
 

 

도도부현 감독청의 인가를 받을 때까지는 교육을 실시할 수 없도록 하고 통첩으로부터 2개월 이내에 각종 학교는 감독청의 인가를 받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야마구치현이 3월31일 학교 폐쇄령을 단행한 이후 재일 조선인은 대규모 반대운동을 하고 대표단은 부지사를 만나 학교폐쇄 조치의 무기한 연기를 요구했다.

 

최종적으로 “교원의 수준, 교과 내용 및 교육시설이 충분하지 않은 학교에 대한 폐쇄를 연기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실정을 조사한 후에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교육시설은 허가할 방침이며 그 결정까지는 종래와 같이 교육을 인정한다”는 야마구치현의 타협안에 대표단이 동의하여 사건은 마무리됐다. 이 타협안에 따라 야마구치현 교육부는 조선인학교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4월28일에 2개교, 30일에 2개 학원, 3분교, 5 월1일에 3학원의 폐쇄 명령을 발했다.

 

폐쇄 후 야마구치현에는 소학교 4개교, 15개 분교, 5개 분실에 남학생 1,212명, 여학생 1,009명이 재학하고 있었으며, 교사는 63명이었다(1948 년 11월 기준). 일본 전역에서 가장 먼저 학교 폐쇄령을 내렸으나 잘 타협하여 마무리한 야마구치현과는 달리 재일 조선인 가장 많이 살고 있던 효고현과 오사카부는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하여 맹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4월24일 고베시에서는 연합국군 점 령기에 유일한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4월 26일에는 오사카부 청사 앞의 군중집회에서 무장경관이 쏜 총에 맞아 16세의 김태일 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바로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하여 저항한 ‘한신교육사건’이다. ‘한신교육사 건’의 전모에 대하여는 많은 저술과 증언들이 있지만 제2회 국회 중의원 ‘치안 및 지방제도위원회’에서 국회조사단이 보고한 내용과 당시의 개별 사건 기록 등을 종합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국회 조사단에는 중의원 소속 국회의원 6명과 ‘사법위 원회’ 직원이 참여하여 1948년 5월4일부터 5월8일까지 5일 간 실시됐다.

 

조사단은 ‘한신교육사건’이 교육상의 문제, 일 본에 재류하는 조선인의 취급에 관한 문제, 사상의 문제 등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완전한 백지의 입장에 서 공정하고 정확하게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자평하고 있다. 일본 패전 후 일본 각지에 주로 조선인 단체가 경영자가 되어 조선인 자제만을 교육하는 학교가 ‘한신 교육사건’ 발생 당시에는 효고현에 42개교, 기타 지역에 분교 1교가 설립되어 학생 수는 약 7천 5백 명이었으며, 오사카부 에는 43개교에 학생 수가 약 1만 1천 명에 달했다.

 

그런데 1948년 1월24일에 문부성 학교교육국장이 각 부현지사에게 “조선인 자제라도 학령에 해당하는 자는 일본인과 동 일하게 시정촌립 또는 사립의 소학교 또는 중학교에 취학해야 하며, 사립의 소학교 또는 중학교의 설치는 학교교육법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도도부현 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통첩을 통지했다. 아울러 도도부현 지사는 문부성의 통첩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하는 내용의 지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청 주변 수백 명 집결 


오사카부에서는 문부성의 지시에 따라 2월6일 조선인학교 교장회의를 개최하여 문부성의 통첩을 설명한 것을 필두로 수차례 정부 방침의 실행에 대하여 지자체와 조선인학교 경영자, 학부모 측 등과 계속적으로 절충을 실시했다. 효고현도 3월5일부터 오사카부와 비슷한 절충을 하였지만 효고현은 오사카부보다 이틀 앞서 4월10일에 고베시내 일본의 소학교를 빌려 쓰고 있는 조선인학교 4개교에 대해 폐쇄명령을 내 렸다. 지사로부터 폐쇄 명령을 받은 조선인측은 바로 폐쇄 명령의 철회운동을 전개했다.

 

효고현이 4월 10일 폐쇄명령을 발한 후 4월12일부터 14일까지 현청에 학부형과 민족단체 대표자가 밀려와 지사를 면회하고 폐쇄 명령의 철회를 요구했다. 4월14일 밤에는 수십 명이 현청의 부지사 방에서 학무부장과 철야문답을 하고 15일에도 계속 부지사실에 남아 지사와의 직접 면담을 요구했다. 15일 저녁 오후 5시 경이 되어 지사는 부지사실에 남아 있던 자들에게 서류로 해산명령을 했으나 철수하지 않았으므로 73명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검거소식을 접한 고베시의 재일 조선인들은 삼삼오오 현청 주위에 집합했는데 그 수가 수백 명이 됐다. 현청에서 체포된 사람 중 70명이 유치되어 있는 경찰서 주변에도 수백 명의 동포가 경찰서를 둘러싸고 경찰과 대치하며 체포된 자들의 석방과 학교 폐쇄 명령의 철회를 강하게 요구했다. 17일과 18일에는 체포된 동포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어 형무소에 이감된 이후로 시위는 진정됐으나, 조련 산하에 교육 대책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가두서명운동을 전개했다.

 

21일 오후 4시부터 효고현청 지사실에서는 지사, 부지사, 시장, 조역(助役, 지자체장을 보좌하고 그 직무를 대리하는 특 별직 지방공무원), 시경찰국장, 검사 등이 모여 23일부로 고베시내의 4개 조선인학교에 대한 가집행처분을 결정했다. 22일과 23일에도 현청에서 재일동포단체 대표와 지사가 면담 했지만 결렬되어 23일 오후 늦게 조선인 소학교에 대한 가집행이 집행됐다. 한 곳의 조선인학교는 무리없이 가집행됐다.

 

다른 한 곳의 조선인학교도 약 200명의 동포들이 강제집행을 방해했지만 효고현 측이 약 150명의 경찰을 동원한 후에 겨우 집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2개의 조선인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던 한 곳의 일본인 학교는 약 1천 명의 군중(군중에는 동포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있었다)이 집행을 방해하였으므로 집달리는 집행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재일 조선인들은 학교를 지키기 위하여 학교 주변에서 철야를 했다.

 

다음날인 24일 오전 9시부터 지사 실에서는 고베시 경찰국장의 요청에 의해 지사, 부지사, 교육 부장, 시장, 조역, 검사, 시경찰국장, 시 공안위원장 등이 전날 가집행에 실패한 학교의 재집행을 언제 하는 것이 좋을지, 26일 3만 명 규모의 재일 조선인 데모가 예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대응할지 등에 대한 협의가 있었다. 10시 10분경에는 공산당 소속의 고베시의회 의원이 재일 조선인을 포함한 수 명을 데리고 지사에게 면회를 신청하였지만 협의 중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그 사이 지사실에서 협의하고 있다는 내용이 공중전화를 통해 재일 조선인 사회에 알려지자 11시경에는 트럭을 타고 오는 사람, 삼삼오오 걸어서 오는 사람 등 현청 주변에 수백 명이 집결했다. 청년 행동대 완장을 두른 약 100여 명이 지사실을 목표로 현청 구내에 들이닥쳤다. 지사실에 있던 보안부장은 시 경찰과 헌병에 연락을 하여 진압 조치를 취하고 지사실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부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것도 모자라 테이블로 이중 방어벽을 만들었다. 이렇게 과민 대응할 정도의 상황이 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종래의 학교 인정한다?


당시 고베시의 조역이었던 関外余南(세키 도요오)은 후일 『遠い日の記録』(먼 날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지사는 후에 지사실에 있던 관청 수뇌부의 생명의 안전을 생각했다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조선인이 결코 우리들의 생명신체에 위협을 가하려는 것은 없었다. 핵심은 지사가 당일 상황에 심리적인 강압을 받았던 것과 본래 심성이 약해서 행정청의 수장으로서 인식 부족이 이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학부형 등이 문을 열라고 요구하면서 대치하던 중 문이 파손됐고 이때 지사실에 있던 검사가 경찰 간부에게 명령했다.


“조선인들이 지사실에 들어오면 권총을 발사해!”


그러나 권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포기했다. 실내에 들어간 동포들은 지사에게 몇 번이나 면회를 요구했는데 지사가 응하지 않는지를 따져 물었다. 지사실에서 동포들이 지사 등 14명과 교섭을 시작하고 있을 때에 헌병 3명이 뛰어 들어왔다. 그 중 한명은 권총을 빼어 동포 중 대표를 향해 겨누었다. 헌병의 행동은 단순히 위협이 아니었지만 학부형들과 민족단체 대표자들은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별안간 대표 중 한사람이 책상 위에 오르더니 상의를 벗어 가슴을 드러내고 소리쳤다. 


“쏴봐, 쏴보라고!”


한 사람의 젊은 여성도 청년과 똑같이 가슴을 열어 재치고 권총을 향해 섰다. 


“어린애들의 학교를 뺏어!”


미군 헌병은 발포를 포기하고 지사만을 데리고 지사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학부형들은 지사로부터 무언가를 듣고자 왔는데 지사만 빠져나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영어를 하는 대표자가 미군 헌병을 반 설득하고 젊은 참가자들이 반 위협하여 미군헌병은 지사구출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후일의 군사재판에서는 지사실을 점거한 대표자에 대하여 ‘헌병에 대한 폭행’이 범죄 사실에 포함되었다. 당시 지사 구출을 위하여 온 미군헌병 세 명도 지사를 구출하는데 실패 한 책임을 들어 제대 조치되었다고 한다.  대표자 중 6명이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어 지사와 교섭을 시작했다.

 

당시 현지 언론에 의하면 현청 앞에는 더 많은 동포들이 모여 만 명을 넘었다. 대표자들은 민족교육의 자주권 확보를 구체화한 세 개의 항목, 즉 (1) 학교 폐쇄령을 철회할 것, (2) 조선인학교를 특수학교로 인정할 것, (3) 쌍방의 위원이 협의하여 결정할 때까지는 지금의 학교를 인정할 것 등을 지사가 수용하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폐쇄 명령의 철회에 관하여는 약 한 시간 반 정도 교섭이 계속되어 岸田幸雄(기시다 사치오) 효고현 지사는 “4월10일 발 한 학교 폐쇄 명령은 철회한다”는 문서에 조인하고 각서 했다.

 

그리고 (2)와 (3)에 대해서도 지사 등 수뇌부는 교섭위원 들의 요구에 따라 오후 3시경 “조선인의 특수학교 인정요구 에 관한 건에 관하여는 후일 쌍방의 위원이 참여하여 협의할 것. 단협의 결정할 때까지는 종래의 학교를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대표자들은 지사와 교섭이 완료하자 다음은 고베시 경찰국 장과 검사를 대상으로 교섭을 시작했다. 학교 폐쇄령이 철회 된 이상 당연히 4월15일에 동포들을 검거한 것도 부당하므로 석방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석방서를 받아 검사와 동행하여 16명 전원을 석방할 수 있게 됐다. 현청 앞의 광장에서는 집회보고가 열려 참석자들은 승리의 기쁨을 억누르면서 교섭 경과보고, 일본 각계 인사의 지원과 격려를 받는 등 축제 분위기였다. 


조선인은 이유 불문하고 체포 


미군 고베 캠프 헌병 본부에서는 4월24일 헌병사령관의 주재로 효고현 지사, 고베시경국장, 소안부장, 검사 등이 참석하는 회의가 열렸다. 고베 헌병사령관 Schmidt 중령은 “고베기지 사령관 메이어 대장에 의하여 오늘부터 고베기지 관내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현재 이후 모든 경찰관은 헌병사령관 의 지휘하에 놓인다”고 선포했다. 고베신문 1948년 4월29일 자에는 다음과 같이 미군의 지시 가 실려 있다.


1) 오늘 밤 중에 조련, 민청 본부, 지부, 분회의 임원 성명, 주소를 조사하여 헌병본부에 보고하고 헌병에 의한 검거에 협력할 것. 각 경찰서장은 조선인 명부를 조속히 제출할 것.

2) 오늘 이후 현청, 시청, 검찰청에 출입하는 조선인은 이유 불문하고 체포하여 헌병에게 인도할 것.
3) 조선인의 집회(학교에 모이는 것을 포함한다), 시위가 있는 경우에 그 지도자를 체포하여 헌병에게 인도할 것. 수명 이상의 집회를 금지한다.
4) 일본 경찰은 4월 24일 지사실 내와 현청 청사 밖에서 시위에 관계한 자는 국적 여부를 불문하고 전원 체포할 것.
5) 4월15일 체포되어 24일에 석방된 자는 전원 다시 구금할 것.
6) 고베시 전역의 교통을 경비하고, 각 철도기관도 감시하여 조선인이 고베 시내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할 것.
7) 후속 연락이 있을 때까지 조련의 본부사무소와 지부사무소의 사용을 금할 것.
8) 즉시 고베시의 전 경찰관을 비상소집 할 것.
9) 오늘 헌병에 검거되었으나 달아난 조선인 간부는 발견한 즉시 헌병에 보고할 것.
10) 조선인의 사정을 잘 아는 경찰관을 헌병사령부에 배치하여 심문에 협력할 것.
11) 이상은 미군의 명령이다. 검거자는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일본의 법률에는 따르지 아니한다.


미군이 일본 점령 기간 중 한 유일한 이 비상사태 선언 후 미군의 지시로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 체포가 시작됐다. ‘조선인 사냥’이라고 하여도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집이든 병원이든 전철이든, 그리고 소년이든 노인이든 무슨 사정이 있건 없건 가리지 않고 체포했다. 『효고현 경찰사 昭和편』에 의하면 이렇게 체포된 자가 효고현에서만 1,73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상규(2017). 『민족교육』 중에서
★다음 호에는 한신(阪神) 교육사건(2)를 연재합니다.

 

MeCONOMY magazine June 2020